소양정은 영서지방 제일의 누정이라 불렸다. 그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소양강과 장양강(북한강)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광을 시와 산문으로 그려내며 칭송하였다. 소양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온갖 풍파를 겪어 퇴락한 작은 비석이 안내문과 함께 서 있다. “春妓桂心殉節之墳(춘기계심순절지분)”이라 새겨져 있는 글귀를 통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은 춘천 기생 전계심의 무덤에 세운 비석임을 알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전계심의 생애처럼 이 비석도 여러 번 옮겨지는 수난을 겪었다.

소양강 근처에 있던 당시의 전계심 비석.      사진 제공=춘천문화원
애초 소양강 1교 근처 봉의산 기슭에 무덤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전계심 비석.       사진 제공=춘천문화원

원래 전계심의 무덤은 소양1교에서 후평동 방향의 봉의산 기슭에 있었다. 이후 도로가 개설되면서 무덤은 사라지고 비석만 소양사 입구 후미진 곳으로 옮겨졌다가 1997년 춘천문화원에서 다시 현재 위치로 이건하고 시에서 안내판을 세웠다고 한다. 비석을 옮기는 와중에 여러 군데 파손된 것을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청오 차상찬 선생이 후면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과 함께 처음 소개하였고, 이후 1940년에 발간된 《강원도지》와 1950년대 집필된 《수춘지》에도 수록됐다.

현재의 소양정 근처로 이전할 때의 안내판 작업 모습.        사진 제공=춘천문화원
현재의 소양정 근처로 이전할 때의 안내판 작업 모습. 사진 제공=춘천문화원

전계심은 일제강점기 잡지인 《개벽》에 남원의 춘향과 함께 병칭될 만큼 전국적인 인물이었고, 이인직의 《귀의성》이란 신소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974년부터 소설가 정비석이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명기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꽤나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전계심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비석 후면에 새겨진 명문이 유일하다. 이 명문은 칠언(七言) 40구의 한시 형태로 쓰여 있는데, 1796년 당시 춘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박종정(朴宗正)이 짓고 유상륜(柳尙綸)이 글씨를 썼다고 비석에 새겨져 있다. 3편의 자료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꽤 많은 글자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비석에 마모된 부분이 있고 박종정의 문집이 현재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글자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문제는 이 명문을 토대로 작성된 비석 옆의 안내문과 도시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최근 번개시장에 조성된 안내판에 심각한 오류가 보인다는 점이다. 한시라는 장르 자체가 난해하여 해석상 오류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큰 문제이다. 대표적으로 전계심이 춘천부사 김처인의 소실이 됐다고 적혀있는데, 조선시대 춘천에 부사로 부임한 인물 가운데 김처인이란 이름은 찾을 수 없다. 비석에는 전계심이 춘천부의 아전에게 출가했고, 무덤을 조성하는 작업을 총괄한 사람이 남편 김처인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이러한 오류는 한시를 잘못 번역한 데다 기생도 등급에 따라 출가할 수 있다는 조선시대 기생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작성되었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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