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영 (시인)

“<조심, 접근금지> / <접근시 발포함> 등등 / 길 위의 경고를 무시하며 / 나의 진화는 / 이 지상을 느리게 아주 느리게 / 산보하는 거야 / 자기의 상처를 자신의 혀로 핥아 내는 / 쓸쓸한 가축들의 흰 발목에 / 마른 풀들이 눕고 / 질주가 힘이라고 믿는 이 시대 위로 / 분분히 낙엽이 질 때 / 가끔씩 내가 나의 족보에 반항하듯 / 그렇게, 한때 / 이 지상에서 나의 꿈은 / 푸른 초원을 느리게 / 아주 느리게 산보하는 거야”(김창균, 〈프롱혼에게〉 전문). 김창균의 시집들을 꺼내 읽고 있는 요즘이다. 이 시는 그의 첫 번째 시집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 듣는다》(세계사, 2005)에 실린 작품이다. 이 시를 다시 읽다가 문득 또 한 편의 시를 떠올린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백무산, 〈정지의 힘〉전문). 백무산의 열 번째 시집《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 2020)에 실린 작품이다.

두 편의 시를 읽으며 이번에는 클라우드 모네를 떠올린다. 아내 카미유의 죽음 앞에서도 한 줄기 빛을 좇았던 인상파 화가. 위대한 세잔마저 “모네는 하나의 눈이다. 그러나 그 눈은 진정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던 모네. 그리고 그의 그림 <생 라자르역>(1877)을 떠올린다. 연기를 내뿜고 있는, 이제 막 도착했거나 아니면 이제 막 출발하려는 기차 두 대가 앞뒤로 배치된 그림.

기차, 인류 역사상 최초로 속도감을 느끼게 해준 기계, 그리하여 그 이전에는 불가능한 곳까지 이동할 수 있게 해준 기계. 그 육중한 철마를 발명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 기계로부터 인류의 불행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차의 발명으로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극복한 인류는 그 대신 더 소중한 것들을 잃기 시작했으니, 기차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모든 공간을 한갓 인상에 지나지 않을 풍경으로 바꿔놓은 것이니, 어쩌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죽인 것은 아닐까. 모네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생 라자르 역이 아니라 기차가 만들어 낼,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질주하게 될 인류의 우울한 미래상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기차에서 내려야 할 때는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17세기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20세기 과달루페 로아에사는 말했다. “나는 구매한다, 고로 존재한다(Compro, Luego Existo).” 21세기 지금은 어떤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브라우징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하는 존재에서, 소비하는 존재로, 욕망하는 존재로, 그리고 브라우징하는 유령으로 우리는 무섭게 질주해왔다. 어쩌면 지금은 이 모든 코기토들이 얽히고설켜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존재는 산보하는 존재다. 그에게 있어 사물은 정지돼 있고, 나무와 풀과 바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어울려 하나가 된다. 구매하는 존재는, 욕망하는 존재는 산보를 하지 못한다. 그는 자동차를 타고 질주한다. 더 좋은 것을 더 빨리 구입해야 한다. 주변의 사물은 이제 타자화된다. 속도가 붙으면 붙을수록 사물은 스치는 풍경이 된다. 브라우징하는 존재에 이르면 풍경조차 사라지고 목적도 사라진다. 광속으로 사라지는 비트들. 우리는 다시 산보를 배워야 한다. 나무와 풀과 바람이 영원히 우리를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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