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춤 연습을 한다면서 춘삼이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 장르는 캉캉춤의 일종인 듯하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다.

사전적으로 ‘키우다’라는 동사는 ①동식물을 돌보아 기르다 ②사람을 돌보아 몸과 마음을 자라게 하다 ③수준이나 능력 따위를 높이다 ④규모, 범위 따위를 늘리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크게는 ‘돌보며 기르다’는 의미와 ‘무언가의 강도를 높이다’는 의미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춘삼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 ‘키우다’의 의미는 물론 ‘①동식물을 돌보아 기르다’였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난 뒤 아이들이 춘삼이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키우다’의 의미가 ‘②사람을 돌보아 몸과 마음을 자라게 하다’까지 확장됐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춘삼이를 돌보는 것이 아이들의 정서를 돌보는 것의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틀 전, 춘삼이와 함께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노닥거리면서 ‘키우다’의 의미가 돌봄에서 ‘무언가의 강도를 높이다’는 의미로까지 확장됐음을 깨달았다. 춘삼이의 존재가 거꾸로 내 인식과 감각의 강도를 키웠다는 뜻이다. 춘삼이가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종이 실제적인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짐을 끄는 말은 경주마보다 소에 가깝다”고 말했다.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접속에 의한 분류인 것이다. 개나 고양이에게만 왜 특별대우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늘어놓은 사람들도 있다. 맞는 말이다. 개나 고양이가 특별한 생물은 아니다. 다만 인간과 가까울 뿐이다.

맹자 양혜왕 편의 이야기다. 제나라 선왕은 제사에 바쳐질 소가 부들부들 떨자 불쌍하니 살려주고 대신 양을 잡으라고 명했다. 소만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해 맹자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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