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 남면 가정리는 “의병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19세기 후반 들불처럼 번진 의병 항쟁의 총수 의암 류인석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거니와 류중악, 류홍석, 류봉석, 윤희순 등 걸출한 의병장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춘천지역에서 수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원인은 무엇보다 무력항쟁의 실천을 추동한 ‘위정척사’ 사상을 가르친 교육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주일당.       출처=《유학근백년》
1980년대 초 주일당.       출처=《유학근백년》

1882년 당대의 산림(山林:국가적으로 대우받은 사림의 명망가)인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 선생이 가정리로 이거하였다. 선생은 화서 이항로 선생의 수제자로 의암 류인석의 7촌 재당숙이며 이름난 유학자였다. 선생은 현재 강원학생교육원 초입에 자그마한 집을 얻어 ‘가정서사’라 이름하였는데, 서사의 외형은 3칸짜리 집으로 각기 칸마다 이름을 명명하였다. 중앙에는 마음에 경(敬)을 두고 정신을 집중하여 외물에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인 ‘주일당(主一堂)’을 두고, 양쪽에는 박문약례(博文約禮:널리 학문을 닦아 사리에 밝고 언행을 바로 하며 예절을 잘 지킴)와 극기복례(克己復禮: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사람이 본래 지녀야 할 예의와 법도를 따르는 마음으로 되돌아감)를 줄여 박약재(博約齋)와 극복재(克復齋)를 두었다. 이것은 학교의 교훈(校訓) 성격을 띠는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인의예지를 갖춘 도덕적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목표지향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현재 주일당.      출처=춘천문화원
현재 주일당.       출처=춘천문화원

가정서사가 설립되자 춘천지역의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가정리 고흥 류씨 문중 인사, 강촌지역의 전주이씨 문중 인사 등이 주요 참석자였는데, 이들은 열흘마다 질의응답을 통한 유교 경전 세미나인 순강(旬講)을 시행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열어 모임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했다. 특히 참석자들은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여 ‘유학의 도(道)’를 지키기 위한 내적 의지를 다져나갔는데, 이들이 향후 의병 항쟁의 인적·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주요한 세력이 되었다. 1889년 류중교 선생은 7년 6개월간의 춘천 생활을 정리하고 충북 제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춘천이 서울과 가까워 개화파 인사가 드나드는 행태를 차마 더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승이 떠나고 가정서사는 친척과 제자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됐으나 스승의 부재와 곧이어 전개되던 을미의병으로 학문은 단절되었고 건물은 훼손되었다. 

이후 류중악, 류중봉 등이 스승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의론을 일으켜 훼손된 건물을 복원하여 ‘주일당’이라 명명하고 스승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주일당은 기둥과 난간이 흔들리고 부서져 날로 쇠락해져 갔다. 광복 후 주일당은 후손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1956년,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건물을 복원·개수하며 제향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비록 네 분(류중교, 류중악, 류인석, 김구)의 위패만을 모시고 있는 낡고 쇠락한 사당이지만 130여 년 전 이곳은 ‘의민지향(義民之鄕) 춘천’을 있게 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라 하겠다. 

춘천학연구소(262-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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