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운 (녹색평론 회원, 연세대학교 국제복지전공 겸임교수)

이른 아침을 깨우는 휴대폰 소리. 

언제부터인지 친정집 유선 번호가 액정에 들어오는 순간이면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 병원이란다. 가뜩이나 톤이 높은 어머니는 누구라도 들으라고 “큰일 났다! 큰일 났어!”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다. 아,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두렵던가.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큰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아버지의 삶이 독립영화처럼 흘러간다. 42년생, 평범하게 가난했던 한국농촌 8남매의 장남, 아버지는 호기롭게 연애결혼에 성공하여 네 자녀를 포함하여 12명의 식솔을 거느린 대장이었다. 어머니가 갓 시집 오셨을 때 막내 시동생이 두 살 꼬맹이었단다. 한평생을 포천 읍내에서 작은 기름집을 운영하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셨다. 가게 앞의 커다란 검은색 짐자전거는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아버지의 짐자전거 앞뒤를 번갈아 차지하며, 우리 네 자녀는 키가 커갔다. 아버지의 허리를 꽉 붙들고 읍내 배달을 함께 다니던 나의 유년시절.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생들 몰래 사주시던 바나나 한 개(!)의 맛은 얼마나 기막히던가.

어느 날 아버지는 어른용 큰 자전거를 얻어 오셔서는 키 작은 딸에게 자전거 안장 아래로 다리를 넣어 타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어린이용 자전거가 따로 없던 그때, 아주 기술적(!)인 자세로 딸은 자전거를 배웠다. 안장 위로 올라가지 않아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니. 두발로 페달을 앞뒤로 딸각딸깍 거리다가 드디어 한 바퀴를 돌리던 그 순간, 그 희열은 자전거를 배워본 사람만이 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세도 우습지만, 자전거가 얼마나 컸는지 나는 자전거에 붙어가는 매미 같았단다. 아버지는 그때가 참 좋았다고 두고두고 말씀하셨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큰딸은 자전거를 삶에서 밀어냈다. 친구 아버지의 자동차는 얼마나 매력적이던가.

아버지는 부지런함으로 따져서 우리 동네에서 두 세 번째였다고 하면 서러워 우실지도 모르겠다. 기름집을 하시면서도 돼지 축사를 만들고, 텃밭을 수시로 가꾸어 밥상을 채워주셨다. 아버지의 짐자전거는 늘 푸성귀가 가득했다. 아버지와 함께 옥수수, 콩, 호박, 가지를 꽤나 잘 심던 큰딸은 공부를 핑계로 흙을 삶에서 밀어냈다. 친구들 앞에서 받는 우등상장은 얼마나 자랑스럽던가.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의 삶에서 멀리 멀리 떠나간 큰딸은 어쩌다 사회복지학 박사가 되었다. 인간의 삶의 질 향상과 지구환경을 고민한단다. 그러면서 급기야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오가고, 텃밭을 가꾸며 건강한 먹거리를 생각한다며 냄새나는 흙을 비벼대고 있다. 아버지는 강요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살라고 단 한 번도 말씀을 주신 적이 없는데, 딸은 아버지의 삶을 어설프게 닮아가고 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줄 알았던 아주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동차와 학위가 있으면 삶이 매력적일 거라 믿었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나 신이 났던가. 그런데 잘못 기획된 축제는 어마어마한 쓰레기들을 남겨 주었다. 아니, 잠깐의 편리와 풍요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기후재앙을 가져올 줄이야. 수백만 년 동안 푸르던 지구가 고작 한 세기만에 이렇게 응급실에 눕게 될 줄이야. 

다행이다. 아버지는 고령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와 감기로 인한 고열증세라 한 달 정도 요양하시면 일상생활이 가능하시단다. 어머니는 그 순간, 누구라도 들으라고 “코로나 아니래! 아니래!”를 외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토록 사랑하는지 큰딸은 비로소 알았다. 아, 정말 다행이다. 어설픈 큰딸이 제대로 아버지를 닮아갈 시간이 주어졌다. 제대로 지구를 사랑할 시간이 주어졌다. 아버지의 자전거면 오늘 우리는 충분하다. 

사족. 그 누구보다 지구를 걱정하던 김종철 선생으로부터 느닷없이 마지막 인사를 받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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