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리듬, ‘리드미컬한 낭송을 위하여’ 2

김진규 (강원교육연구소 교육국장)

지금 쓰는 ‘<청포도> 2’는, 지난 7월에 쓴 ‘<청포도> 1’에 이어지는 글이다. 지난 글을 함께 참조해 읽으면 이해에 좀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시를 줄이면 이렇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가듯,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흰 돛단배가 올 것인데, 거기에는 청포를 입은 손님이 타고 있을 것이다. 포도가 익을 때, 내 손은 함뿍 적시기 위해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듯, 나는 아이처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맞을 것이다.’ 지난 연재 글의 1, 2연에 이어 3연부터 마지막 6연까지 이어간다.

3연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의 1행 ‘하늘’에서 ‘하’의 [ㅎ]과 2행 ‘흰 돛 단 배’에서 ‘흰’의 [ㅎ]은, 5연 2행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의 ‘함뿍’에서 ‘함’의 [ㅎ]과 6연 2행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의 ‘하이얀’에서 ‘하’의 [ㅎ]과 이어지며 ‘후두음 [ㅎ] 리듬의 계열체’를 이룬다.

육사 시로선 드물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시 <청포도>에서 “초인”은, “내가 바라는 손님‘으로 그 모습을 달리한다. 백마를 타고 오는 대신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 창작 시기로 미루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선명하고 밝고 깨끗한 이미지에 더 눈길이 간다. ‘전설-하늘-푸른 바다-청포도-청포’로 이어지는 푸른 빛깔과, ‘흰 돛단배-은쟁반-하얀 모시 수건’의 하얀 빛깔의 대비로 시는 그대로 수채화가 됐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된 것인데, 좀 더 직접적으로 견줘보자. ‘푸른하늘/흰구름’, ‘푸른바다/흰 돛단배’, ‘청포도/하이얀 모시수건’, ‘청포를 입은 손님/아이’. 명징한 회화성이 돋보이지 않는가.

덧붙여 강조해야 할 건, ‘청포도’와 ‘청포’를 잇는 그 리듬(=의미)의 중심점에 <청포도>의 핵심이 있다”는 점이다.

이육사의 <청포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비평가의 견해가 없지 않은데, 특히 조동일은 “고난의 노래가 아니라서 사치스럽고, 투쟁 없는 기다림으로 미래의 희망을 달성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빠져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는 아마도 6연 1행의 ‘아이’를 시동(侍童)쯤으로 여겼나보다. 만일 ‘아이=시동(侍童)’이라면, <청포도>가 귀족적 취향을 드러낸 것이라는 그의 해석을 수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이는 시동이 아니다. ‘아이야’의 아이는 ‘시적 화자(주체)가 손님을 맞으려고 품은 그의 정갈한 마음’의 표현이다. 6연을 다시 보자.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아이야’와 ‘하이얀’이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모음의 소리를 품고 나타난다. 그러니까 아이는 ‘하이얀 모시 수건’의 변형이다. 청포를 입은 손님이 오면, 나는 그를 위해 헌신하는 시동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 마음. 이것이 <청포도>의 결구에 숨은 뜻이다. 소리와 뜻은 하나다. 이렇듯 리듬으로서의 ‘소리-뜻(=프로조디)’는, 단순하게 리듬만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시의 숨은 의미까지, 때론 시인의 무의식의 심연까지 드러낼 때도 있다.

소리-뜻으로서의 리듬인 프로조디, 현대시의 리듬을 톺아볼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프로조디!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가, 우리의 ‘지식의 공백’을 열어줄 만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가. 나는 리듬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요즘 부쩍 ‘시는 매력적이고, 리듬은 참 매혹적’이라 느끼고 있다. 하긴 의미론적 핵심에 리듬이 있고, 리듬의 핵심에 의미가 품겨 있으니, 달리 리듬을 외면할 도리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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