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원치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것 같은 언어를 던졌을 때면 종일 마음에 가시넝쿨이 칭칭 감긴다. 앉은 자리가 불편하고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싱숭생숭이란 말이 딱 맞을 것 같다. 태풍이 지나느라 온통 흔들리는 바깥으로 나서본다. 아주 작은 쥐손이풀이 피어있고 좀작살나무의 구슬 같은 열매들이 보랏빛으로 익어간다. 초록의 들풀들이 유연하게 흔들리며 만들어 내는 풀 물결의 아름다움이라니. 비로소 마음에 초록빛 풀물이 든다. 

<전원> 교향곡을 작곡했을 때의 베토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 곡을 작곡하던 해에,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테레제 말파티에게 보냈다던 편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숲속을 거닐 때, 나무들을 지날 때, 풀을 밟으며 그리고 돌멩이들을 밟으며 걸어갈 때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숲, 나무, 돌멩이는 우리가 원하는 울림을 전해줍니다.” 

어린 시절 술주정뱅이로 난폭했던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와, 사랑을 했지만 이루지 못해 헤어진 연인들과의 사이에서 견뎌야 했을 베토벤의 고뇌는 무척 깊고 아픈 상처였을 것이다. 게다가 들리지 않게 된 귀.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그렇지만 위대한 작곡가는 그 슬픔 속에 도사린 아름다움. 장조에서는 나타낼 수 없는 장엄하고 묵직한 단조의 그 눈물 같은 선명한 딥블루의 색채를 음악의 선율에서 찾아낸 듯하다. 그 선율은 그가 많이 걸으며 만났던 자연, 하늘과 바람과 햇살 그리고 시냇물의 흐름들이 슬픔과 내통하며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가 작곡한 선율이 아름답지만 유난히 깊고 슬픈 느낌으로 예리하게 마음을 그어대는 이유가 설명이 될 것 같다. 

베토벤의 교향곡 중 가장 서정적이고 다정하고 온화한 느낌의 선율로 노래하는 곡이 <전원>이다. “소리를 통한 그림이라기보다는 느낌과 관련된 음악”이라며 직접 <시골 생활에 대한 회상>이라고 제목까지 붙인 그의 몇 안 되는 표제음악 중 하나. 온몸을 관통하는 자연의 소리와 빛깔들이 주는 느낌을 음악으로 다 표현해 놓고도 작곡가는 관객들이 그 느낌을 다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스러웠는지 급기야 매 악장마다 다음과 같은 짤막한 설명을 곁들여 부제를 두었다. 1악장-시골에 도달했을 때의 상쾌한 느낌. 2악장-시냇가의 풍경. 3악장-시골 사람들의 즐거운 모임. 4악장-폭풍. 5악장-목동의 노래(폭풍이 지나간 뒤 즐겁고 감사한 마음).

교향곡의 사전적 의미는 “관현악으로 연주되며 여러 악장으로 된 소나타 형식의 악곡. 보통 4악장으로 이루어진 곡이 많다. 하이든으로부터 비롯되어 모차르트, 베토벤을 거쳐 확립되었다”라고 설명되어있다. 이해를 돕자면 자동차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Sonata(대개 3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기악 독주곡)는 원래 기악 독주곡이지만 교향곡은 소나타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형태로 생각하면 되겠다. 3개 혹은 4개의 독립적인 악장으로 만들어진 곡인데 <전원>은 고전 교향곡의 4악장을 따르지 않고 5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 곡 연주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지만 오늘은 5악장이다. 코로나가 지나고 있고 마이삭과 하이선이 지난 자리. 상처가 야속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한 맑고 새파란 하늘에서 노릇하게 익은 가을햇살이 뚝뚝 떨어진다. 폭풍이 지난 후의 감사와 즐거움을 노래한 베토벤의 마음을 담은 5악장을 들으면 비단 같은 날개로 사뿐하고 나붓하게 나는 잠자리의 비행을 꼭 닮은 현악기의 선율이, 아픔이 깊숙이 새겨진 마음을 풀 빛깔로 살살 만져주던 전원 속에서 베토벤이 느꼈던 특별함 감성의 내면을 슬쩍 보여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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