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북읍 용산리 주민들이 판서대감 무덤이라고 일러주는 곳을 찾아가면 신헌의 묘가 나온다. 정확하게는 신헌의 조부와 부친,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하여 후손의 무덤도 함께 조성된 평산신씨 집안 묘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무관이자 학자, 외교관이었던 신헌은 구한말 조선의 외교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묘역엔 잡초가 무성하여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신헌의 가문은 조선시대 문무 양쪽에서 모두 뛰어난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 가운데 신헌의 직계는 임병양란 이후 대대로 무반의 길을 택하는데, 조부인 신홍주와 신헌, 신헌의 아들인 신정희, 신석희 등 4명이 무신의 최고반열인 장신(將臣)에 올랐던 대표적인 무반가문이다. 

신헌의 묘역(2019년 7월 촬영)

신헌도 가문의 전통에 따라 18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무신의 길을 걷는다. 그는 무인이면서도 김정희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정약용을 사숙하여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유장(儒將)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박규수, 강위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서양식 근대무기를 수용하여 신식무기를 제작하기도 했던 군사전문가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과 고종 양쪽의 신임을 받아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모두 조선 측 협상단 대표로 활약하였다. 

신헌의 장남인 신정희도 무신의 길을 걸어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의 명에 따라 양호순무사에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의 난을 진압하였고, 일본과 노인정회담을 벌일 때 조선 측 대표로 참가하였다. 또한 신헌의 손자인 신팔균은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하다가 군대해산령이 내려진 후에는 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고, 한일합병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다가 전사한 애국지사이다.

신헌의 비석(2019년 7월 촬영)

강화도조약은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라고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다. 특히 일본의 치외법권만 인정하는 조항이 불평등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는데, 이는 사실 조선의 외교 정책과 일치하는 조항이다. 조선시대에 왜관에서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은 본국의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대마도로 송환시키는 것이 관례였고,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없었기에 조선에는 불필요한 조항이었다. 

약소국 대표로서 현실을 직시하고 불평등한 조항을 최대한 줄이고자 고뇌한 신헌의 갈등과 고민은 최근 간행된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림대학교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는 송호근 교수의 《강화도》란 책이다.

국제정세는 흔히 약육강식의 정글에 비유된다. 15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 현재의 대한민국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절대 강자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사심 없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 그 옛날 신헌만큼 깊게 고뇌하는 정치가가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때다. 정치 행적이나 외교성과에 대한 평가는 다음 문제이다.

춘천학연구소(262-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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