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문화비평가)

영화를 보면서 머리를 쥐어짜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영화의 기능 중의 하나는 오락 또는 해소기능이다. 사람들은 가볍게 그리고 즐겁게 스트레스를 풀어낼 마음으로 극장을 찾는다. 전체 이야기 흐름이 복잡하고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낯설거나 난해한 영화를 찾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간혹 난해하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영화가 관객을 불러 모는 경우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 Tenet>(2020)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는 이미 <인터스텔라, Interstellar>(2014)와 <인셉션, Inception>(2010) 그리고 <메멘토, Memento>(2000) 등을 통해 관객들을 어지럽게 만드는 영화도 흥행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들 영화가 한 번 봐서는 잘 이해 안 된다고 한다. 적어도 두 번 이상 보아야 전체적인 맥락이 보이고 세세한 상징과 의미들이 이해되며 드디어 세밀한 영화 기법이나 장치가 보인다고 한다. 영화는 신나고 쉬워야 한다는 공식을 감독은 어떻게 무너뜨렸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손잡은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현대물리학이다. 그는 현대물리학 이론 중에서 하나를 끄집어내어 대중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물리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인프라를 구성하여 영화를 자문해주고 있다. 감독도 현대과학에 관하여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한다. 그가 현대물리학에 손을 내민 건 대단히 현명한 일이다. 그는 현대물리학이 가지고 있는 신비감과 과학성을 영민하게 영화로 끌어들였다. 

현대물리학의 바탕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시간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진척을 보인 현대물리학은 입자라는 미시세계와 우주라는 거시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해내고 있다. 현대물리학은 물질적이지만 대단히 정신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영화의 소재로 삼기가 좋다. 물질의 은유로 공간을 다루고, 정신의 은유로 시간을 다루어 두 요소를 교차시키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물질과 정신을 동시에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과학영화 즉 현대물리학 이론을 기초로 한 영화가 주목을 받는 것은 현대인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현대인은 과학적 사고를 좋아한다. 사실적이거나 적어도 거의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감동한다. 현대물리학은 기초가 과학이기에 대단히 실증적이고 사실적이다. 또한, 현대인은 동시에 환상적 또는 상상이 가미된 내용을 요구한다. 기계 또는 과학 속에 살면서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현대물리학은 과학적이라는 엄정함과 정신적이라는 모호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이 품고 있는 두 욕구를 현대물리학은 동시에 만족시켜 줄 수 있다. 단지 영화가 되기 위해서 감독이 먼저 충분히 이해하고 대중적으로 다시 펼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아무나 쉽게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수학과 과학이라는 장벽 때문에 많은 감독이 넘어서기를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 벽을 넘으려는 도전을 쉼 없이 하고 있다. 

경외감에는 놀라움의 감정과 두려움의 감성이 복합되어 있다. 놀라움은 모르는 게 불쑥 등장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고, 두려움은 내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경계심으로부터 생겨나는 감정이다. 경외감이 들게 하는 학문인 현대물리학이 영화 속으로 들어왔기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복합된 경외심을 갖는다.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이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말한 ‘누미노제(Numinose)’라는 신성한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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