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영 (시인)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순한 양이 되었다 //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졸시, <식구> 전문). 졸시 <식구>를 처음 쓰겠다고 생각한 건 진은영의 시 〈가족〉을 읽었을 때였다.

“밖에선 /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 집에만 가져가면 / 꽃들이 / 화분이 // 다 죽었다”(진은영, 〈가족〉 전문). 언젠가 진은영의 이 시를 읽고 이렇게 메모를 해두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힌, 남편이란 이름의 꽃, 아내란 이름의 꽃, 딸이란 이름의 꽃, 아들이란 이름의 꽃, 모든 꽃들을 이제는 야생으로, 본래의 자리로 돌려주어야 할 때에 이른 것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고색창연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가족과 식구라는 이중의 관계에 대해 천착한 것이. 가족은 서로 같은 유전자를 가진 소위 혈연의 집단이라면, 식구는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졌지만 한솥밥을 먹는 사회적 집단이라는 생각. 가족이 동이불화를 보여준다면 식구는 화이부동을 보여준다는 생각. 가족이 죽임의 관계라면 식구는 살림의 관계라는 생각. 그러니까 진은영 시인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가족의 병리 현상이라면 나는 그 반대로 식구의 치유력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다는 그런 생각. 나의 시집, 《식구》는 그렇게 구상되고 쓰였던 것. 그런 까닭에 시집 《식구》에서 이런 자서를 썼던 것.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는 것이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天依人人依食, 萬事知食一碗)’는 해월 선생의 말씀은 일종의 생태우주론이다. 식구론이다. //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흡사 가마솥 같다는 생각을 한다. 흙과 물과 공기 그리고 거기에 기댄 모든 생명체들이 한솥밥을 먹고 사는 식구라는 생각을 한다. // 식구 / 한솥밥을 먹는 둥글고 둥근 입이 / 한울이다. // 한 식구가 모여 한 세상을 이룬다. / 그 한 마음으로 한 시집을 묶는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절벽의 문제, 5포 6포 세대의 등장, 가족의 해체 등등 우울한 기사들이 넘쳐나더니 이제는 오히려 그런 우울한 기사들이 더 이상 우울하지 않게 될 만큼 이 사회는 중증의 병을 앓고 있다. 소수자들의 사회로부터의 소외 문제는 더 이상 사회 문제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충무로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50대의 사내가 죽은 지 7일 만에 발견되었다 그는 <바보들의 행진>의 구두닦이였고, <영자의 전성시대>의 깡패였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식당주인이었고, <만다라>의 걸승이었고, <칠수와 만수>의 페인트공이었고, <남부군>의 인민군 18이었고, <하얀 전쟁>의 베트공 13이었고, <악어>의 포주였고, <실미도>의 버스 승객 7이었고, 그 사이 한 여자를 만나 동거를 할 때도, 그 여자 아들 데리고 떠나갔을 때도, 그는 스크린 속에서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 촬영 중인 영화의 택시기사역이 일주일 전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촬영장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르는 것처럼, 그의 죽음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졸시, 〈어느 필모그래피의 죽음〉 전문)

졸시, 〈어느 필모그래피의 죽음〉은 15년 전에 발표한 것이지만, 시를 통해 내가 고발하고 싶었던 소외의 문제는 15년이 지난 지금 해결은커녕 오히려 더 깊고 더 넓게 전염병처럼 퍼졌다. 가족이라는 이기심(利己心)은 노! 식구라는 이타심(利他心)이 예스!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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