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나뭇잎이 떨어진다. 한 잎을 집어 들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다.

나뭇잎 한 장의 무게가 뭐 얼마나 무거울까마는 한 생의 무게를 지탱하고 나무 끝에 질기게도 매달려있었던 날들을 생각하면 떨어진 나뭇잎 한 장에도 경외심을 갖게 된다.

비어가는 들판에 서서 내 나이는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를 셈 해보니 살아있을 날보다는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진 시점을 이미 지났다. 친구와 싸우고 석 달을 말 붙이고 싶어 몸살을 앓으면서도 토라진 입으로 쌩 돌아앉아 있었던 단발머리 중학교 시절. 보랏빛 노을을 바라보며 창가에 이마를 맞대고 전혜린을 이야기하던 여고 시절 영남이도 생각이 난다. 좋아하던 머스마에게 헤어지잔 말 한마디를 듣고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아픔에 하얗게 지새던 밤. 서리내려 상고대가 하얗게 피어있던 예술관 오솔길을 지나며 십 년 후 내 옆에 서 있을 그 사람은 누굴까 상상했던 시간도 이제 저편에서 나를 멀리 건너다본다. 

지나고 나면 아픔도 상처도 단풍 들어 아름답다. 해 뜰 무렵 느티나무 위에 설핏 떠 있는 낮달에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것도 지나온 어느 시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가질 수 없었던 것들, 보내버려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아릿한 기억들.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 가을은 또한 모순의 계절이다. 빨갛고 노란 단풍이 세상의 빛깔을 화려하게 변모시키고 고개만 들면 눈이 시릴 정도의 파랑색 하늘이 가득하지만 명랑함보다는 묵직한 우울이 먼저 마음에 담기니 말이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3악장이 꼭 그런 느낌이다. 장조인데도 슬픔이 덧 발린듯한 느낌의 선율. 내 기억의 저 너머를 복기하게 하는 음악. 베토벤의 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음악 교향곡 9번 <합창>. 너무나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교향곡 9번은 4악장만 귀가 뚱뚱해지도록 들어온 것 같다. 너무나 장엄한 기악의 분출과 합창의 장엄함. 그렇지만 지금 이 가을에는 3악장이어야 한다. 베토벤이 그려내는 현악과 목관악기의 선율은 정말 감미롭다. 슬픔이 깊이 스며있는 비극적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어쩌면 3악장만 뚝 떼어내 들려주면 이 음악이 합창   교향곡인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1, 2악장과 4악장의 사이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선율로 기악곡을 지나 성악곡이 건너오는 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 같은 악장. 심각한 1악장을 다독거려주는 2악장을 지나며 3악장은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새잎 돋는 설렘도 비바람 거센 폭풍이 지나는 여름도 화려했던 꽃들도 다 비워 버리는 겨울이 인생의 모습이라고. 세상에 대한 허무의 멜로디를 꼭 끼워 앉혀 둔 듯한 악장. 그다음 4악장에서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환희의 송가가 웅변처럼 쏟아져 나오니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표현할 수 없는 눈물이 와락 쏟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 나뭇잎 물들어 떨어지는 이 가을의 끄트머리에서는 합창교향곡의 3악장이 제격이다. 안개를 보려고 나선 이른 아침 막 떠오르는 햇살 앞에서 마주친 황금빛 들판, 그 옆에 추수를 끝낸 빈들, 마주한 높은 산 뒤로 올라오던 먹빛 안개. 아무 계획 없이 마주친 풍경 앞에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던 낮은 흐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곡에 대한 모든 설명은 생략한다. 이어폰을 꽂고 가을이 내다보이는 창 앞에서 그냥 한 번 만나보라 권하고 싶다. 걷다가 툭 채는 가을 느낌에 온몸이 반응하듯 음악에 반응하는 나를 만나는 시간. 붉은 단풍잎이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선율로 나풀 내려앉는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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