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13도제로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춘천은 강원도 수부도시가 된다. 근대교육기관도 이 시점에 설치되는데, 1896년 강원도관찰부소학교(현 춘천초)를 시작으로 1910년 춘천농업학교(현 소양고), 1924년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 1934년 춘천공립고등여학교(현 춘천여고), 1939년 관립춘천사범학교(현 춘천교대)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춘천초등학교와 소양고등학교는 100년의 역사를 넘겼고 몇 년 후면 춘천고등학교도 100년을 맞게 된다. 꽤 유서 깊은 학교가 여럿임에도 현재 근대학교 건축과 관련된 유산은 거의 남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폭격이나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인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춘천교육대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는 춘천사범학교 기숙사 식당 굴뚝이다.

현 춘천교육대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는 춘천사범학교 기숙사 식당 굴뚝     출처=춘천학연구소

춘천사범학교는 1939년 3월 1일 현 봉의초교 자리에서 개교했으나 1941년 석사동 현 춘천교대 위치에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사범학교는 초등교사(당시에는 훈도라 불렀다)를 양성하던 중등 수준의 국립(당시에는 관립) 교육기관이며 각 도별로 설치되어 초등교사를 양성하고 배출했다. 춘천사범학교는 6년제 보통학교(초등학교)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는 5년제 심상과와 5년제 중등학교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는 1년제 강습과로 운영되었다. 입학생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역을 대상으로 모집했는데 1939년 1회 심상과 입학생의 경우 100명 모집에 431명이 지원하였고, 1942년에는 13대 1까지 경쟁률이 급증하였다. 사범학교 입학 경쟁률이 높았던 것은 수업료 면제는 물론 장학금(당시에는 관비) 지급과 졸업 후에 교원으로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제도는 당시 똑똑하지만 가난했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조건이었지만, 반면에 식민권력에 부합하는 교사를 양성하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의 유인책이기도 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1년 이상 의무적으로 기숙사에 입소해야 했다. 집단생활을 통해 군국주의 정신을 주입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기숙사는 2개 동, 2층 구조로 1개 동에 22개 실로 총 44개 실과 300평 규모의 식당, 세면장, 목욕탕으로 구성되었다. 기숙사 일과는 오전 6시 기상과 함께 아침 점호, 식사, 등교, 저녁점호, 식사, 학습, 야간 점호로 이루어져 군대 일과와 같았다.

춘천교육대학 50년사에 식사시간과 관련한 졸업생의 회고가 남아있다. “아침 점호 후 구대 별, 반별로 식당에 입실하여 전 사생이 6명씩 1조로 식탁 앞에서 전원이 입실할 때까지 대기했다. 식사시간은 식사훈(食事訓)을 제창하고 최하급자 2명이 밥과 국을 배식했다. 식사예절은 무릎을 꿇고 소리를 내지 않으며 국그릇에 입을 대지 않고 젓가락을 사용해야 했다.” 이와 관련된 사진도 남아있는데 학생인지 군인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식민지 청소년들의 애달픈 모습이라 하겠다.

어떤 건축물이든 역사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1980년대 춘천교대에서는 학교 환경정비 차원에서 일제강점기 세워진 기숙사 식당 굴뚝을 철거하려다가 동문의 항의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지금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교정 구석에 숨겨진 듯 서 있지만, 춘천사범학교 기숙사 식당 굴뚝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사범교육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춘천학연구소(262-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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