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면 가정1리 마을회관 건너편으로 구릉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한참 달려가면 만나는 마을이 박암리이다. 이 마을에 대감산소, 또는 양문대감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다. 조선 후기 정치가와 문학가로 이름을 날렸던 이서구(李書九)와 그의 부친 이원(李遠)의 묘역이다.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의 12번째 서자 인흥군(仁興君)의 5세손이 이원이고, 이원의 아들이 이서구이다. 부친인 이원은 당쟁에 휘말려 서인으로 강등당하고 유배의 후유증으로 48세에 운명하여 정치적으로 큰 발자국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아들인 이서구는 우의정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게다가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와 함께 4 대가로 불릴 정도로 한문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원/이서구 부자 묘역 전경

실록에서는 이서구가 사무를 잘 처리하였다고 평가하였고, 많은 장부를 환히 꿰뚫고 있는 판서는 이서구밖에 없다고 한 호조 아전들의 언급도 있거니와 관료로서의 능력만을 따졌을 때 유성룡보다 떠 뛰어나다는 김매순의 평가가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이서구는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전횡하던 시기에 오로지 탁월한 행정 업무 능력을 바탕으로 최고 지위까지 오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등 지방관으로 부임한 곳에는 원혼의 억울함을 풀어주거나 화재가 발생할 것을 미리 알아서 큰 피해를 막았다는 등 그와 관련된 설화가 수백 편이 넘게 전해지고 있다. 보통 전승되는 설화의 주인공이 전우치나 박문수 등 특출한 능력을 지녔거나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대부분인데, 이서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백성들이 그를 그만큼 믿을만한 목민관으로 신뢰하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전면과 후면이 바뀐 채 서 있는 이서구 비석

이서구의 무덤을 남면 박암리에 조성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이서구 사후에 비석을 만들기 위한 석재를 강원도에서 채취하여 홍천강 물길을 따라 싣고 오던 중 박암리 앞에 이르자 배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아 하늘의 뜻이라 하여 이곳에 무덤을 조성하였다는 이야기다. 이는 집안의 선영에서 분리하여 무덤을 조성한 경우에 흔하게 따라붙는 전설로 실제와는 다르다. 원래 이서구 집안의 선영은 경기도 포천 영평현 양문리였고 부친인 이원의 무덤도 그곳에 있었는데 묫자리가 길하지 못하다고 하여 이미 박암리로 이장한 상태였다. 부인의 무덤도 그 아래 조성한 것으로 보아 생전에 이미 자신의 묫자리를 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치가, 시인으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무덤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근처에 어떠한 표지판이나 안내문도 없을뿐더러 문인석과 동물석은 이미 도난당했다고 한다. 더욱이 땅속에 묻혀있던 비석을 발굴하여 세우면서 앞뒷면을 바꿔놓았고 현재까지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춘천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이제라도 시 정부와 유관기관에서 문화유적에 대한 총괄적인 점검과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겠다.

춘천학연구소(262-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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