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영 (시인)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스물세 살의 전태일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5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가 죽고 18년이 지나서야 그의 일기와 편지, 관계기관에 보낸 진정서 등을 묶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라는 책이 나왔다. 그리고 3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살아 있을 때도 누군가에게는 죽은 사람과 다름없었고(살아서 외친 그의 말을 들어준 자들이 있었나?), 그는 죽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살아 있다(노동의 현실은 50년 전보다 과연 나아졌나?). 그렇다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그의 외침은 과연 이 세상을 바꾸는 씨알이 되기는 하였을까.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가 된 것은 아닐까(물론 그가 죽고 48년 만에 주 52시간 노동제가 실시되긴 하였지만 과연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걸까). 

와중에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황규관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전태일 서거 50주기를 맞아 대구의 전태일 옛집을 방문해서 낭송했다는, 그의 시를 읽는다. “노예 생활을 박차고 떠난 민족은 /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 방황과 분열과 굶주림과 투쟁의 나날이었습니다 / 기계임을 거부하며 제 몸에 불을 붙인 / 한 청년은, 중음신으로 50년을 살았습니다 / 젖도 없고 꿀도 없는 50년이었습니다 // 그래서 죽어서도 살 수가 없었지요 / 죽어서도 차마 죽지 못했습니다 / 스스로 죽고도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 뇌성번개에 작은 육신을 태우고도 / 영혼이 꺾이지 않았으니까요 // 자고 나도 노예이고 잠을 못 이뤄도 노예이며, 싸우면 / 싸울수록 기계가 되는 이승의 세월을 / 저승에서도 굴리고 있었던 겁니다 / 그게 벌써 50년입니다 / 깃발로 살아온 50년입니다 / 고공농성으로 펄럭인 50년입니다 / 피로 노래를 만들고 / 노래로 다시 피를 만든 50년입니다 // 몸 없이 살아온 50년 동안 / 집 없이 살아온 몇 해를 더 보태 봐도 / 아직 바다는 멀고 강물은 몸을 / 비틀고 떨고 기며 바윗덩이를 굴리고 있습니다 // 이 모든 것은 오막살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오막살이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고 / 오막살이만이 마르지 않은 샘물이었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광야이고 / 광야이어야만 하며, 광야를 떠도는 바람으로 / 겨우 지어진 오막살이입니다 // 전태일, 그대가 다시 돌아와 / 이 마루에 걸터앉아 쬐고 있을 햇볕도 / 아직 여기에서는 끝나지 않은 채찍입니다 / 몸속을 파고드는 불꽃입니다 / 굴리고 굴려야 할 바윗덩이입니다”(황규관, <오막살이 집 한 채―전태일의 옛집에서> 부분) 

“깃발로 살아온 50년” “고공농성으로 펄럭인 50년” “피로 노래를 만들고 / 노래로 다시 피를 만든 50년” 그리하여 마침내 “몸 없이 살아온 50년”이라는 구절 앞에서 그만 먹먹해지고 만다. 먹먹하고 아픈 황규관의 시를 읽다가 책장 구석에서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을 꺼내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누렇게 바랜 전태일 생전의 문장 몇 구절을 다시 읽는다.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敗者)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버스비로 배고픈 시다들에게 빵을 사주고 이승의 집까지 삼십 리 길을 걸어갔고,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하며 자신의 생명까지 미련 없이 벗어주고 저승의 집으로 떠났지만, 이승의 집도 저승의 집도 닿지 못한 채 “중음신으로 50년을 살”고 있는 여전히 청년인 전태일. 그의 죽음을 디딘 지 50년. 그래서 과연 세상은 좀 더 나아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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