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계절의 끄트머리. 그토록 화려하던 세상의 빛깔을 일순간에 모두 지워버리고 가장 겸손한 빛깔로 조용히 가라앉는 시간. 들판 가득 내린 서릿발이, 남아있는 작은 생명들을 가만히 안아 종일 땅속 깊숙이 숨기느라 부산스럽다. 단단한 결빙의 계절을 지나려 대지가 품는 숨소리들이 번지는 곳. 산촌의 겨울 풍경이 주는 그 알싸한 맛을 누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 배후령 터널을 지나 자동차전용도로에 접어드는데 오른쪽 하늘로 빠알갛게 해가 넘어간다. 까맣게 드리운 산의 실루엣 위로 온통 하늘이 붉은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계절의 끄트머리는 비어있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인데 하루의 끝자락은 사그라들기 전 불꽃처럼 타들어 가는 화려함이라 그 대비가 오묘하다. 시간을 다 한 것들. 소멸의 아름다움을 생각해본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또 음악을 뒤적거린다. 어떤 음악이 닮았을까. 카르멘의 새빨간 관현악 색채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건 너무 관능적인 빨강이다. 저 그윽한 깊이의 붉은빛을 가진 슬프면서도 화려한 빛깔의 곡은 어떤 것이 있을까. 리스트의 헝가리안 광시곡이 떠오르는데 슬픔과 화려함이 적절히 섞인 멋진 선율이 어울릴 듯하지만 그건 좀 현란하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베토벤의 현악선율이 저런 울림이다. 그렇지만 현악기의 선율만으로는 좀 약하지 않을까 하는 순간 갑자기 Triple Concerto(삼중 협주곡)가 떠오른다. 콘체르토(Concerto)는 협주곡 즉 오케스트라와 독주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형태의 기악곡이다. 대부분은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첼로 협주곡 등 한 개의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협연하는 형식인데 베토벤의 Triple Concerto(삼중 협주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3중주를 독주 악기로 보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독특한 형태이다. 

바로크 시대에 한창 유행했던 합주협주곡의 형태로 모차르트를 거치며 흐지부지 없어진 이런 연주 형태의 곡을 베토벤은 자신의 작곡 시기 중 가장 전성기 시절에 왜 뜬금없이 만들었을까. 문헌상으로는 베토벤의 어린 후원자이며 피아노 제자였던 루돌프 대공을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피아노 실력이 썩 뛰어나지 않은 제자 대공을 무대에 세우기 위해 독주아닌 삼중주를 선택한듯 하다. 때문에 피아노는 첼로와 바이올린보다 훨씬 쉽게 작곡되어 있어 연주자의 수준을 맞춰야하는 삼중주의 각 독주자들을 섭외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정명훈처럼 피아노를 전공한 지휘자들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지휘를 하는 무대를 보이기도 한다. 

베토벤도 이 곡을 만들면서 그 어울림을 위해 고심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이고, 다시는 이런 형태의 음악을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들어보면 역시 베토벤이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2악장은 거의 첼로선율이 주류를 이루며 아주 짧은 간주곡처럼 지나지만, 바이올린과 어우러진 작곡가 특유의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어울림 그리고 피아노의 반짝거림이, 어둑해져 오는 산머리에 번지는 깊은 붉은빛의 느낌으로 온몸을 휘감아 들 것이다. 쉼표 없이 3악장으로 연결되어 어우러지는 오케스트라와 삼중주의 절묘함이, 고요하게 번지는 붉은 노을 위 찬란한 황금빛 구름의 느낌으로 너무나 멋스럽다. 

시인의 시도 작곡가의 음악도 세상에 내놓으면 이미 그건 읽고 듣는 이의 것이라 했던가. 작곡가가 어떤 의도로 작곡을 했던지 지금, 이 순간에 내게는 이 음악이 제격이다. 이 계절 노을을 마주하며 차 한잔과 함께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 2, 3악장을 들어본다면, 나이 들어간다는 것. 저무는 뒤안길이 꼭 서럽고 쓸쓸한 것만은 아닐 것 같은 위안을 만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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