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소주고개를 넘어야 남면에 갈 수 있었다. 보통 고개 정상에는 행정구역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설치되지만 소주고개 정상에는 행정구역명 대신 ‘義民之鄕(의민지향)’이라 새긴 표지석이 서 있다. 의병의 고장이란 자긍심을 드러낸 것으로, 의암 류인석 선생, 윤희순 의사 등 걸출한 의병장이 이곳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강촌IC를 지나 남면사무소에 이르면 윤희순 의사 거택(居宅) 안내판이 서 있다. 윤희순 의사는 우리나라 여성독립운동가 중 가장 첫머리에 오르는 분이다. 1860년 서울에서 출생해 16세에 춘천 남면 발산리 사람 류제원과 결혼하여 춘천과 인연을 맺고 36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의사가 춘천에서 살았던 시기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였던 때였다. 1895년과 1907년 춘천에서는 항일의병항쟁의 불길이 타올랐고 뜻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무기를 들고 싸움터로 나갔다. 당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정을 지키는 일이었다. 사회 문제는 여성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는 ‘나라 구하는데 남녀가 따로 있지 않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항쟁의 불길로 뛰어들었다. 

윤희순 의사 의적비      출처=춘천학연구소

1910년 국치(國恥) 후 의사의 가족은 만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진력한다. 의사는 학교를 세우고 윤 교장이 되어 항일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한편, 목숨을 건 항쟁에도 직접 나서 가족부대를 조직, 최일선에서 일제와 싸웠다. 무기를 들었던 가족들이 차례로 희생되고 1935년 아들인 류돈상마저 일제에 체포되어 순국한다. 의사의 생도 여기까지였다. 이후에도 의사의 가족은 선대를 이어 싸움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까지 4대 60년을 조국 독립에 바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윤희순 의사의 삶이 알려지고 그를 기리기 위한 선양사업이 진행되었다. 1982년 할머니를 좇아 밀서를 가슴에 품고 만주 벌판을 달렸던 손자 고(故) 류연익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은 소장하고 있던 의병 관련 문헌 4천여 점을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에 기증한다. 후대에게 의병의 역사를 올바로 전하기 위함이었다. 1982년 11월 9일 강원대학교(당시 이상주 총장)에서는 기증자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윤희순 의사가 살던 발산리 항골 집터에 비(碑)를 세웠다. 비 전면에는 ‘海州尹氏 義蹟碑(해주윤씨 의적비)’란 글자와 ‘안사람 의병가’ 노랫말이 적혀있고 3면에는 윤희순 의사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이것이 윤희순 의사를 세상에 알린 최초의 기념비였다. 

이후 의사의 업적은 널리 연구되고 알려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와 동상 건립, 1994년 중국으로부터 유해 봉환, 2002년 독립기념관 어록비, 요녕성 환인현에 노학당 유지비 건립 등 선양사업이 국내외에서 추진되었다. 춘천시청소년도서관 뒤편에 있는 윤희순 의사의 동상이 조만간 공지천 의암공원으로 옮겨진다고 한다. 공(公)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의사의 역정(歷程)이 춘천인에게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춘천학연구소(262-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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