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강원교육연구소 교육국장)

오늘, 그가 떠났다.

이십칠 년 전 오늘, 늦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 한다/ 두 동강 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 아―/ 그 말만 생각하자/ 그 말만 믿자 그리고/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죽음을 살자” (문익환, <마지막 시> 전문). 그해 오늘, 동주의 다정한 벗 늦봄은, ‘죽음을 살아’내다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윤동주 시인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갔듯, 늦봄도 자신의 벗 동주처럼 ‘별을 노래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죽음’을 살아냈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설에서 일흔의 노인은, 죽어간 청춘 스물여섯 열사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늦봄이 두 팔을 벌리고 스스로 십자가가 되어 <그날이 오면>이라는 배경음악 속에 피를 토하며 열사를 호명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혈구의 앙금 속에 잠자던 슬픔이 올라와 가슴을 조이고 목을 메이게 한다. 문익환 목사의 장녀 문영금 씨는, “아버지는 열사들께서 돌아가실 때마다 ‘이 사람들이 못다 이룬 꿈을 다 이뤄주려면 이 사람들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늦봄 문익환은, 문익환으로 태어나 목회자와 신학자로 살았다. 그리고 동주의 죽임을 만나면 동주로, 몽규의 죽임을 만나면 몽규로 살았다. 장준하를 만나면 장준하로, 전태일을 만나면 전태일로, 이한열을 만나면 이한열로 그들의 ‘죽음을 살다’ 떠났다.

1945년 2월 16일 금요일 새벽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곤 그만 영영 별이 되었다. 우리 나이론 스물아홉이라지만, 이 세상엔 고작 27년 2개월을 머물다 떠났다. 그래도 문익환 목사는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라며 순결한 젊음으로 동결된 윤동주를 외려 다행스러워했다.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언사이리.

오늘 최두석의 <윤동주>를 읽는다.

2019년 8월 15일 민족문학연구회에서 엮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독립운동의 접두사》에서 최두석 시인의 시 「윤동주」를 만났다. 반가운 일이다. 윤동주 시인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본 것처럼 오늘, 스스로 거울에 자신을 깊게 비추어 볼 일이다.

“북간도 명동촌/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서/ 맑은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있었다// 서울의 온돌방에서/ 교토의 다다미방에서 시를 쓰면서도/ 마음속 길을 따라 우물을 찾아가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곤 하였다// 후쿠오카 감옥에 갇혀/ 의문의 주사를 맞고/ 나날이 수척해가는 자신의 몰골도/ 그 우물에 비추어 보았다//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날/ 캄캄한 밤하늘/ 영롱하게 반짝이던 별 하나/ 빛을 뿌리며 우물 속에 떨어졌다// 그가 감옥에 갇혀 의문의/ 주사를 맞으면서 쓴 시는 어디에 있나/ 최후까지 그의 마음속에 빛나다가/ 별똥별로 떨어진 시는 어디에 있나.” (최두석, <윤동주> 전문).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날”의 “캄캄한 밤하늘”에 “영롱하게 반짝이던 별 하나”가 “빛을 뿌리며 ‘우물’ 속에 떨어진” 그런 날이 있었다.

동주를 품고,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여섯 번의 수감 끝에 1994년 1월 18일 모진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껴안은 채 떠난 이가 있었다. 가슴에 묻어둔 눈물이 하늘의 별처럼 글썽거리는 날도 있다.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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