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고탄리 숲지기)

하늘은 늘 우리에게 천국의 어디인 양, 매일 새로운 풍경화 한 폭을 선사하신다. 오늘 산길엔 어찌나 흰 꽃송이 같은 눈을 펑펑 내려 주시는지 땅이 하늘인지 하늘이 땅과 닿은 건지 온 천지가 눈꽃 세상이었다.

산속의 모든 것들과 온 세상을 하얀 꽃으로 장식하고 있는 순결한 이 겨울 모습들은 그대로 세상의 처음 장면이었듯 싶었고, 인간들의 죄업 이전 같았고, 마치 나 혼자만을 위한 듯한 이런 걸작들을 감상하며 걷는 산길은 입춘 지나 며칠 후인 지금 박새나 청딱따구리와 멧새들의 백 뮤직까지 은은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독백이 그냥 우러나왔다.

사는 재미가 무엇인가 자연 속에 묻혀 살기로 했으니 부자 생각은 애초 포기했고 매일 산행을 하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사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삶 아닌가 무엇을 더 바라는가, 다만 아직도 많이 남은 이기심이나 도시의 티를 없애고 사람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등이 큰 숙제이나 이것들은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것이고 또한 책으로 수양하듯 마음을 닦는 일 아니겠는가? 나의 편협함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지 못함은 나의 모난 성격이기도 하며 앞으로 내가 고쳐 나가야 할 큰 문제이기도 하고 이젠 더 이상 미룰 여유도 없이 허송한 시간들이 안타깝고 이런 나의 우유부단함이 때로 화가 나기도 하다.

하산 길, 벚꽃 같은 겨울 꽃잎들은 머리에도 얼굴 위에도 따순 손길처럼 내리며 하늘 빈 켠 한 쪽마저 점점이 수놓아 가고 있었고, 나는 설경 속의 움직이는 한 배경이 되고 한 마리 산짐승이 되어 산길을 헤매고 있다. 

천 년 만 년을 내리던 눈이 내 머리에 떨어지고 있고 훗날 나 또한 땅에 떨어진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눈은 어느새 차거움으로 느껴지고 갑자기 현실의 삶이 시리게 느껴져 온다. 녹아 없어지는 눈처럼 존재마저도 잊혀지는 외롭고 쓸쓸한 삶은 무엇인지, 산다는 것은 평생이 이런 생각의 연속인지 어느새 다다른 하산 길의 눈이 밟히는 발자국 소리가 오늘따라 뼈 소리 같고 아픔 같다.

강아지들만이 신이 났다. 저 개들처럼 평생 일편단심일 수 있다면, 한 주인만을 죽도록 생각하는 편집적인 사랑일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랑을 잃어버리고 시도 때도 없이 아파하는 숙환 같은 삶이 아니었으면, 떠난 사랑이 눈 속에서도 춥지 않았으면, 이제 그만 사랑도 일생도 떨지 않았으면. 눈은 그침이 없이 내 정수리 위에, 심장 위에, 때론 등 속으로 소스라치게 떨어지고 있다. 내 입에선 흰 입김이 피어오르고 발자국은 길게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아직도 나를 따라오고 있다. 

살아 있다고.

눈송이 하나하나는 수많은 눈길이다. 하늘을 쳐다보던, 내리는 눈을 쳐다보던 눈동자다. 글썽이던 눈, 빛나던 눈, 설레던 눈, 반짝이던 눈, 그리움의 눈….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