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일 기자

최근 한 걸그룹이 동화 같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을 살펴보면 현재 한국사회의 변화와 대중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2011년에 데뷔했지만 대중의 사랑은커녕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했고 수입도 거의 없었다. 때문에 꿈을 접은 일부 멤버들은 팀을 떠났고 여러 번 멤버가 바뀌면서 4인조로 재편됐다. 그래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멤버의 평균나이는 30살, 더 늦기 전에 다른 직업을 찾기로 결심하고 팀해체 논의를 시작했다. 그게 불과 몇 주 전인 2월의 상황이다.

그런데 3월 중순 현재, 기적이 일어났다. 4년 전 대중이 외면했던 노래가 모든 음원 차트에서 1위를 휩쓸고 급기야 지상파 음악방송에서도 첫 1위를 차지했다. 4인조 재편으로만 치면 1천854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가수도 팬들도 울먹였다. 방송프로그램 섭외가 밀려들고 팬들이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 유튜브와 포털에는 관련 영상과 기사로 넘쳐난다.

영화도 이렇게 만들면 욕먹을 것 같은 대반전 스토리의 주인공은 걸그룹 ‘브레이브걸스(BraveGirls)’이고 노래는 〈롤린 Rollin’〉이다.

이유가 뭘까? 세 가지다. 유튜브와 알고리즘, TV의 몰락, 그리고 진정성이다.

반전의 시작은 지난달 24일 유튜버 ‘비디터’가 자신의 채널에 올린 ‘브레이브걸스 롤린 댓글모음’이라는 영상으로 시작됐다. 이 콘텐츠는 군부대 위문공연에 간 브레이브걸스의 ‘롤린’ 무대 영상과 댓글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영상은 흙먼지를 일으키는 군인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환호, 최선을 다하는 멤버들의 열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재치 있는 댓글도 인상적이다. “전쟁 때 이거 틀어 주면 전쟁 이김”, “18군번인데 선임한테 인수인계받고 후임한테도 인수인계했다”, “인민군도 흔들어 제낄 노래” 등등 군복무 시절 그들의 무대를 가까이서 본 예비역들의 댓글들이다.

그런데 이 영상이 유튜브 이용자들의 클릭 러시를 일으켰고, 마침내는 이용자가 관심을 가질 법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추천·노출해 주는 유튜브 알고리즘 선택까지 받았다. ‘롤린’의 무대 영상은 이러한 알고리즘을 타고 인기 동영상으로 등극하더니 1천만 조회수를 넘어섰다. 더불어 2019년 해병대 1사단 ‘위문열차’ 공연 등 관련 영상들도 조회수가 급상승하더니 음원시장의 소비자들까지 사로잡았다.

‘롤린’의 역주행 현상은 올드 미디어인 TV의 종언을 상징한다. 올드 미디어 언론보도의 위세가 약화된 데 이어 대중문화영역에서의 영향력도 급격히 줄면서 음악·예능 방송이 스타를 만드는 시대가 저물고, 유튜브와 SNS 스타를 TV가 모셔 가는 시대로 돌입했다. 특히 Z세대의 등장이 이를 더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들은 거대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콘텐츠보다 자신이 좋아하고 직접 발견한 콘텐츠를 더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또한 ‘밈(meme)’ 등 콘텐츠를 놀이하듯 즐기며 확산시키는 데도 능숙해서 유행을 선도한다.

Z세대는 콘텐츠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아티스트의 됨됨이나 스토리까지도 살피는 경향이 있다. 최근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의 학폭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분노한다. 그래서 진정성이 없다면 유튜브 알고리즘과 SNS 덕으로 일시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지만 대중의 사랑까지 얻기는 힘들다. 브레이브걸스의 성공이 빛나는 건 진정성 있는 스토리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유명한 무대에 설 수 없었던 그들은 국방TV ‘위문열차’ 등 위문공연을 중심으로 수년간 활동해 왔다. 백령도 등 전국 곳곳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가서 수입과 홍보에 도움도 안 되는 공연을 진심을 다해 펼쳤다. 진정성 있는 무대가 쌓이고 쌓여 ‘롤린’은 선임이 후임에게 대대로 인수인계해 주는 노래가 됐고 그들은 군인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됐다. 최근 영상에는 힘이 되어 고마웠다는 예비역들의 댓글이 넘쳐난다.

전쟁터 같은 대중음악계에서 인기 없는 아이돌 그룹을 10년 넘게 버리지 않고 챙겨온 소속사의 스토리도 감동을 더한다. 이런 배경이 Z세대마저 사로잡은 것이다.

물론, 연예인의 벼락 성공에 사회적 의미를 욱여넣어 침소봉대한다고 힐난할 수 있겠다. 또 우리 사회에는 위문공연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이 대중에게 주는 감동과 위안이 꽤 크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SNS에서도 이들의 성공에 흐뭇해하는 언급이 많다. “그녀들의 역주행이 지친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성공하고 눈물짓는 그녀들에게서 다시 힘낼 에너지를 얻었다”, “작은 무대에서도 최선을 다한 진심이 마침내 통했다”, “사재기 가수, 일진 출신 말고 진짜 이런 그룹이 떠야지”, “학폭·투기·코로나 등 우울한 뉴스뿐인데 이들에게서 큰 위로를 받는다.”

대중문화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서도 이런 기적이 종종 일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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