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문화비평가)

춘천에 살면서 봄을 제대로 느껴 본 경우가 많지 않다. 온풍기가 멈출 즈음이면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찰나의 고장에 살고 있기에 눈 깜박할 사이 지나치는 봄을 잡기 위해서는 두 눈을 단단히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춘천 살아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늘 봄 속에 살고 있어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춘천의 봄은 깨달음과도 같다고 답했다.

의외로 봄을 제목으로 내세우는 영화가 드물다. 국내 영화는 물론 외화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외국 애정 영화가 특별한 계절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그나마 일부 영화가 가을이나 겨울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새로움을 의미하는 학생들의 입학이 가을인 까닭도 있고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등의 축제가 늦가을과 겨울에 있는 문화적 배경도 있다.

봄을 시작 또는 출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우리와 일본이다. 그래서 그런지 봄과 관련한 영화는 주로 우리 영화와 일본 영화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 영화의 경우에는 그들의 국화인 벚꽃과 관련한 영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우리 영화의 경우에는 시작의 의미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영화적으로 벚꽃은 사랑을 표상하고 새 학기는 사랑의 시작을 비유한다.

봄 영화의 시조는 김수용 감독의 <봄 봄>(1969)이다. 이미 제목으로 감지할 수 있듯이 원작은 김유정의 소설이다. 60년대 들어 국가의 대대적인 영화 지원전략의 하나로 문예영화가 제작될 시기에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만들어진 영화다. 원작을 매우 많이 훼손한 영화이기에 새로 만들어질 만한데 여전히 영화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봄의 이미지를 상기시킨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와 류장하 감독의 <꽃피는 봄이 오면>(2004)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의미하는 봄은 사랑에 대한 기억 반추 또는 사라져 가는 탄광과 그곳 아이들의 사그라듦에 대한 역설인 새로움 또는 부활이지만, 우리에게 봄의 의미를 단단히 일깨워 주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입에 올리기 싫은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을 할 수 없이 언급한다. 제목마저 철학적으로 보이는 영화는 호수 위에 떠 있는 절의 풍광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성일이 감독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2)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배경과 이야기 진행은 전혀 다르지만, 제목에 관한 힌트는 이미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 대단히 파격적인 영화인 조근현 감독의 <봄>(2014)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 후반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남편이 전사하자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한 여인의 삶의 단면을 다루고 있다. 여인은 절망감을 안고 시골로 내려온 조각가의 모델이 되고, 드디어 두 사람은 새로움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봄’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정용주 감독의 새로운 시도의 영화 <다시, 봄>(2018)에서도 봄의 의미가 새로 시작이란 의미인 것처럼 대부분 우리 영화가 상징하는 봄은 ‘새로움’ 또는 ‘시작’이다. 아이로니컬하게 이들 영화에서 봄꽃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만개한 벚꽃을 배경으로 직유적으로 사랑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본 영화들과 달리 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우리 영화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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