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정 (책 대여점 즐겨찾기 운영, 춘천여성민우회 운영위원)

책 대여점을 운영하는 나는 요즘 춘천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도시가 살롱’ 사업에 선정돼 매주 40대 여성들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눈다.

‘도시가 살롱’ 사업은 카페, 책방 등 공간을 가진 시민이 주인장이 되어 프로그램을 구성해 시민들을 초대해 주제가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업이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발한 문화 사업인가? 21세기 춘천에 프랑스 살롱 문화를 도입하여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고 취향대로 별도의 공간에서 만나는 모임이다. 이것은 동아리나 동우회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이며, 끈끈한 유대감이 없어도 된다. 철저하게 개인화된 형태의 사회성을 전제로 한 커뮤니티다.

17세기부터 시작된 프랑스 ‘살롱 문화’는 남녀와 신분의 벽을 깬 ‘대화와 토론의 장’이었다. ‘문화의 공간’으로 문화와 지성의 중개소 역할을 했으며, 대부분 여성들이 개장하고 운영했다.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 영역이 됐다. 살롱의 여주인들은 남성 지배적이고 폐쇄된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살롱을 개장했다. 살롱 문화는 여성들의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됐으며 남성과 수평적 관계 속에서 문학과 철학을 토론하는 장이 됐다. 

21세기 살롱 문화도 마찬가지다. 이 문화 속에서는 차별과 혐오가 발생되지 않는다. 같은 취미와 좋아하는 컨텐츠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에 살롱 안에서는 나, 취향, 전문가, 존중, 개인화 등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 살롱 문화는 여성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의미는 확대되고 진화하고 있다. 

춘천 ‘도시가 살롱’ 사업은 살롱을 통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를 존중하고 자연과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정확히 보인다. 독립서점, 나와 지구를 살리기 위한 채식 맛보기, 고양이 전문책방 파피루스, 성평등 그림책 모임 등 젠더, 환경·생명을 고민하는 컨텐츠를 선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성평등 그림책 보기’다. 그림책을 함께 읽고 마음 상담, 심야 독서 모임, 우리만의 북 콘서트, 손 재활 프로그램 등을 하며 코로나19로 인해 지친 40대 이상 여성들이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프로그램이다.

첫 시간은 마음 카드를 활용해 지금의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정해진 2시간을 넘어도 그녀들은 멈추지 않고, 가슴 속 깊이 참아왔던, 화를 폭포처럼 쏟아 냈다. 코로나19로 인해 자녀들이 게임과 유튜브에 빠지는 것에 대한 속상함,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서 동동거린 이야기, 외출하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지속되는 잔소리, 남편의 재택근무로 인한 피곤함, 경영난으로 폐업을 하게 된 사연 등 삶의 애환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족들의 감정의 쓰레기통까지 되면서 돌봄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하는 40대 여성들의 고충이 날것으로 토해졌다. 기혼자는 비혼자에게 “혼자인 게 부럽다”고 말하고, 비혼자는 노후를 혼자 준비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여성들이 짊어진 무게를 나누었다. 각자의 집이 또 다른 일터가 되어 맘 편히 쉴 곳이 되지 못해 우리가 모인 살롱에서 숨을 고르고 가고 싶다고 그녀들은 말했다. 우리들은 서로를 마주하고 공감하면서 인생의 숨을 고르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굉장히 어려운 주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여성들이 삶을 나누고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돌봄의 책임과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해 늘 어딘가에 묶인 채 사는 것만 같은 여성들이 마음을 내놓고 힘겨운 시간을 토로하는 것에서부터 여성주의는 시작된다. 그 시간은 평등하게 같이 사는 삶을 이야기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대접받기보다 여자로 대접해야 하는 힘겨움을 공감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방 문을 활짝 열고 그림책을 읽고, 인생의 한가운데서 숨을 고르기 위해 쉴 곳을 찾는 이를 기다리고 있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