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기억과 기념 속에서 계승되는 것
1980년 춘천보안대에서 고초를 겪은 강원도의회 박인균 도의원

1980년 춘천보안대 고문 및 가혹행위 피해자인 박인균 도의원의 <초당에서>라는 시의 일부다. 후덕한 시골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박 의원은 시를 즐기며, 최근 일간지에 자작시를 게재한 ‘시인’이다. 시인이라 함은 그 ‘담박한 심성’과 ‘섬세한 시선’을 주변으로 내보내며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태생적 유전자의 소유자 아닐까.

시인 박인균과 서슬 퍼런 보안대를 연관 짓기란 통상의 상상력으로는 어렵다. 하지만 시인의 관점은 다르다. 탱크와 최루탄으로 국민을 짓밟는 국가의 폭력을 맞닥뜨렸을 때, 그 ‘담박한 심성’과 ‘섬세한 시선’은 어디를 주시했을까.

그랬다. 시인은 자기 내면에 충실하며 시대를 직시했다. 회피하지 않았다. 묵인하지 않았다. 투쟁의 길로 떨쳐나섰다.

보안대와의 첫 악연

영동지역 고등학교를 입학한 박 의원은 실존에 대한 고민, 세상의 부조리함 등등 성장통을 남달리 겪으며 방황했다. 이후 동기들보다 고등학교를 1년 늦게 졸업, 1980년 3월 강원대학교 농대 곤충병리학과에 입학했다.

YH사건 등 유신 국가폭력에 분노하던 청년 지식인으로서 첫 발길은 강원대 ‘민중문화연구회’라는 써클(동아리)로 이어졌다. 그렇게 맞이한 대학 초년생의 삶이었다. 1980년 초 춘천의 대학가는 군부독재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하루 멀다 이어지고, 참여 학생들도 매번 수천 명에 이르러 명동거리를 가득 메우곤 했다.

그러던 와중에 5월 17일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계엄 전국 확대 사실도 모른 채, 박 의원은 학교에서 선배들과 ‘춘천 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란 유인물을 만들다가 전원 춘천보안대로 연행되었다. 전국 계엄 확대로 연행된 강원대 교수와 학생은 100여 명에 이르렀다.

보안대의 시작은 무조건 구타다. 처음 겪는 구타와 잠 안 재우기의 연속이었다. 속된 말로 옷과 몸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렇게 1개월간 보안대를 겪고 훈방(?)되었다. 이후 보안대의 구타와 고문에 민주화의 길로 나서기를 주저하기도 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타오르는 분노와 양심이 주저함을 밀쳐냈다.

이후 독서 모임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길을 모색하다가 1982년 동료 8명과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시위, 이른바 ‘강원도 성조기 소각 사건’을 주동해 1년 5개월의 감옥살이를 했다.

 악랄한 보안대의 또 다른 덫

이후 노동현장에 몸담기 위해 서울을 거쳐 태백에 둥지를 틀고 광산노동자를 위한 소모임 조직 등 노동운동을 도모했다. 그런 와중에 보안대의 악랄한 마수에 걸려들었다. ‘미인폭포 사건’이다.     

모임 내 장익수(본명 장창국)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노동자들을 소개하겠다며 박 의원을 다방으로 불러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친구들이 미인폭포에 있다며 데리고 갔다. 아무도 없었다. 이후 그는 보여 줄 게 있다며 숲속으로 데려가더니 숨겨 놓은 가방을 가져왔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철제 사제폭탄과 다이너마이트 도화선. 그는 영월 상동에 있는 미군 부대 폭파 참여를 종용했다. 박 의원이 단호히 폐기하라고 하자, 순순히 그러겠다며 긴장을 늦춰 놓고는 순식간에 철제폭탄으로 박 의원의 뒷머리를 내리쳤다. 박 의원은 30m 계곡 절벽으로 굴러떨어지다가 바위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 가까운 마을로 가서 안면 있는 신부님과 부모님 등에게 사실을 알리고, 부모님을 만나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동리검문소에서 완전무장한 군경 수색조에 체포되어 태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사건은 묘하게도 보안대의 자진 철회로 일단락되었다. 후문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와 보안대 두 기관의 간첩 검거 성과 다툼에서 보안대가 밀린 것이라 전해진다. 평범한 광부로 살아가다가 프락치로 포섭된 장익수 역시 사건의 희생자였다. 목숨을 잃었다면 성공한 간첩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강릉보안대에서 풀려난 후 후유증에 오랜 기간 시달렸다. “문을 이중삼중 걸어 잠그고 칼을 베게 옆에 두고 자야 할 정도로 감시나 체포에 대한 공포가 심했다. 지금도 물체가 갑작스럽게 움직이면 숨이 멎는 것 같고, 군복만 보면 불안하다.”

보안대 터는 국가폭력의 사죄 공간이 되어야

박 의원은 이렇듯 두 번이나 보안대의 국가폭력과 마주해야 했다. 치떨리는 분노를 삭이며 박 의원은 말한다. “분노를 넘어섰다. 하지만 국가폭력은 고발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국가는 사죄와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하나가 춘천보안대 터를 국가폭력 기억의 공간으로 조성하는 일이다.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우이자 치유의 첫걸음이다.”

기억은 기록과 기념을 통해 당대를 치유하고 후대로 이어진다. 춘천에는 그러한 역사적 공간이 하나둘이 아니다. 의병을 기리는 의암공원, 청년학생 독립운동의 표상인 춘천농고 항일운동기념탑 및 춘천고 상록탑, 6·25전쟁을 기리는 전적기념관 등등. 이러한 역사 공간이 춘천 민주화운동의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이제는 위로와 치유, 기억과 전승의 공간으로 보안대 터에 민주평화기념관이 자리해야 할 시점이다.

박 의원은 국가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민주화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펼치고 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위한 ‘강원독립운동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 발의·제정, 국가폭력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민간인 학살 위령 지원 조례’ 공동발의 등이 ‘섬세한 시선’의 결과물이다.

<귀천>을 노래한 시인 천상병도 모진 국가폭력에 꿈을 접고 초야에 묻혀 귀천을 노래했다. 하지만 박 의원은 다르다. 사랑하기에 치열하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신동엽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보안대 터에서 먹구름을 걷어내는 첫 삽을 뜨자. 민주평화기념관으로 변신한 보안대 터에서 박 의원의 시 전시회가 열리는 그날을 응원한다.

이창래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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