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눈으로, 입으로, 코로 즐긴다는 말이 있다. 빛깔과 맛과 향으로 다른 술과 차별화하자는 뜻일 것이다. 그중 맛을 보는데 흔히 쓰는 표현에 ‘바디감’이라는 것이 있다. 훌(full), 미디엄, 라이트 등으로 말한다. 그중 ‘묵직한 바디감’이라 하면 최고의 찬사다. 그런데 정작 ‘바디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입안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상태”이긴 한데 콕 집어 한마디로 정의하기 애매하다. 대부분 “우유와 맹물을 마셨을 때 우유가 더 바디감이 있다”라는 등으로 얼버무린다.

아주 오랜 시절, 프랑스의 샤토 마고(Chateau Margaux) 와인 공장에서 며칠간 머물 기회가 있었던 때 이야기다. 와인에 까막눈이던 그때, 양조장 수석연구원에게 내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들려준 이야기다.

와인 양조에 제일 중요한 온도를 옛날엔 어떻게 조절했을까? 프랑스 마고 지방의 9월경 날씨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충분히 익은 포도를 생산해서 와인을 담을 시점이 되면 기온은 대개 15℃에서 17℃쯤의 선선한 가을 날씨가 된다. 이 온도에서는 제아무리 효모가 좋다 해도 발효가 쉽지 않다. 최소한 22℃ 정도는 돼야 첫 발효가 시작된다. 인위적인 냉·난방이 어림없던 시절, 어떻게 그 온도를 맞출 수 있었을까?

어마무시하게 큰 나무로 짠 양조통에 포도를 채우고 목욕재계한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포도를 밟은 후에 체온으로 과즙의 온도를 올렸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특히 젊은 처녀총각들을 선발해서 연이어 손을 잡고 통에서 춤을 추었다고 했다. 젊은 남녀라야 더 많은 열이 나지 않았겠느냐는 너스레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해,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양조 온도가 적당하던 때가 있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맛을 봐도 그해의 와인 맛이 다른 해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는 거였다. 보통 여름이 더우면 포도가 실해져서 수확량도 좋고 품질도 좋은 게 일반적이다. 유난히 덥고 일조량도 충분해서 기대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품질이 더 떨어졌다. 양조 책임자는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과정들을 이전 해와 비교해 보니 딱 한 가지가 다른 게 있다는 걸 발견했다. 바로 청춘남녀들의 온도조절이 그 해엔 빠졌던 것이다. 처음엔 설왕설래했다. 그러나 다음 해의 맛과 또 다른 늦더위 해를 비교해 보고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다. 바로 인간들의 바디와 접촉이 빠진 것이 원인이라는 결론이었다. 뭔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차이가 나는 묵직한 맛, 그때부터 ‘바디감’으로 불렀다고 들었다. 그후 이 표현은 위스키나 커피 등등에서 차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금 오래전 이야기지만, 강원인재개발원 초청으로 와인 강의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첫 강의 때 나는 청바지에 평상복 차림이었다. 다른 과목 강사들이 모두 넥타이에 정장을 한 것과는 퍽 대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내가 의도한 것이었다. 와인은 격식을 갖추고, 지식을 겸해야 하는 까다로운 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와인에 갓 입문한 초보들은 바디감이 어떠니, 무슨 향이 어떻게 나느니 하며 유난을 떤다. 지적 호기심을 탓하는 게 아니다. 와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선 ‘술이다’. 술은 우리의 감성을 높여 준다. 생활을 위해 꽉 조여 맨 이성의 허리띠를 잠시라도 느슨하게 해 주는 음료다. 와인도 그 중 하나다.

홍성표(전 한국와인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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