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는 청평산에 자리 잡은 유서 깊고 의미가 큰 사찰이다. 

청평산은 고려시대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곳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자현은 고려시대 당시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자연은 세 딸을 고려 문종의 왕비로 시집을 보내 그 딸들은 순종(12대) 선종(13대) 숙종(15대)을 낳았고, 이자현의 사촌 이자겸은 딸을 예종(16대)에게 시집 보내 인종(17대)을 낳았고 딸 둘마저 인종의 후비가 되었으니, 근 100년간을 왕실과 혼맥을 맺어 더할 수 없는 권력을 누린 집안 출신이다.

이자현은 29세가 되던 해에 아내가 죽자 돌연 부귀영화와 권력을 버리고 아버지가 마련해놓은 청평산에 들어와 문수원을 열고 세상과 단절하였다.

이자현을 기리기 위해 세운 ‘진락공 중수 청평산 문수원기’ 뒷면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향기로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이름난 차를 마시니, 오묘한 쓰임이 종횡으로 이루어져 그 즐거움이 끝이 없었다.

(飢餐香飯 渴飮名茶 妙用縱橫 其樂無涯)”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시어 오묘함이 자유자재(自由自在)이니 그 즐거움이 끝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평가했다. 

춘천의 정신을 말하려면 청평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청평(淸平)”이란 무슨 뜻인가? 청빈(淸貧) 속에서도 평안(平安)함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정신적 깊이를 뜻한다. 이렇게 높은 정신적 깊이는 부귀영화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시는 이자현의 정신적 높이와 그 깊이를 일깨워준다.

푸른 봉우리에 터 잡아 사니

家住碧山岑

보물인 거문고만 남겨져서

從來有寶琴

한 곡조 탄들 방해받지 않지만

不妨彈一曲

다만 들어줄 친구 없어라.

祗是少知音

이자현은 청평산 식암(息庵)이란 곳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은 몸을 누여도 돌아눕지도 못하며 다리를 뻗지 못하고 다만 무릎을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매우 작은 공간이었다. 남겨진 것이라곤 거문고뿐이라 어떤 방해 받음 없이 연주할 수 있지만, 찾아와 그 음악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완전하게 세상과 단절된 세계다.

이자현의 둘도 없던 친구로는 같은 해에 급제했던 곽여가 있다. 곽여는 식암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시를 남겼다.

“구름 가린 골짜기에 드니 일찍이 누가 될 일 없고, 밝은 달만 냇가 비춰주니 세상 먼지에 물들지 않았구나.

(浮雲入洞曾無累 明月當溪不染塵)”

이자현은 부귀영화와 권력을 버리고 자연으로 귀의를 실천하여 자연과의 합일을 도모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사회구제의 사명감도 없이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서 자기위안과 자기만족에 도취하여 일생을 살았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자현이 추구한 정신적 높이는 현대인의 무한 물질추구와 권력에 방향성을 둔 욕망 지향의 삶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청평산은 이자현이란 인물이 있어 탈속과 청빈의 지위를 얻었고, 비움과 치유의 청정 도량으로 자리매김을 받고 있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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