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은 누구에게나 환상적이다. 화려한 꽃길을 걸을 때면 울적한 마음은 어느덧 상쾌하고 신나는 마음으로 변한다. 우리 인생도 꽃길만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 꽃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해준다. 그래서 죽어 갈 때도 꽃상여를 타고 저승길로 떠나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꽃 같은 인생, 꽃처럼 피어나는 화사한 인생을 살다가 꽃처럼 예쁜 모습으로 누구나 가고자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꽃 만발한 산으로 가는지 모른다. 그곳이 산소(山所)이고, 산소는 우리말로 ‘뫼’, ‘묘’, ‘무덤’이라 한다. 사람의 무덤이 있는 곳을 일러 산처(山處)라 한다. 그리고 다른 말로 영역(靈域)이라 하여 신성한 곳으로 일컫는다. 우리는 조상의 묘소를 지키려고 묘막(墓幕)을 짓기도 했다. 이럴 때 산소가 있는 산은 곧 저승이다. 우리의 국조 단군할아버지도 죽어 저승인 산의 신이 되어 갔다. 산신령이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 ‘뫼’, ‘무덤’, ‘산소’는 금기의 사항이 아니다. 누구나 죽어 가는 저승세계, 인간이 신의 영역으로 되어 가는 장소가 곧 산소이다. 오죽하면 우리가 동경하는 신선들은 모두 산에서 살고 산에서 놀까.

산에 대한 예찬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원인이 있다. 바로 석사동에 있는 애막골 때문이다. 《춘천의 지명유래》를 찾아보면, 애막골을 이렇게 기록해두었다. “애막골(艾幕洞): 애막골 애맛골로 부르는 애막골에는 애마골고개가 있다. 애막동이라고도 부른다. 안화산에 있는 마을이다.” 아주 짧은 설명이지만 많은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애막골에 대한 유래가 아주 분분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그 표기만 봐도 벌써 네 가지나 된다. 이에 대해서 춘천의 토박이인 이무상 시인은 그의 저서 《우리의 소슬뫼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애막골은 애총(애塚), 즉 ‘어린애 무덤’이 있는 ‘애뫼골’이었으나 애막동(艾幕洞)으로 쓰여지고 애막골이라 칭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또 《강원도민일보》의 기사에서는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시묘살이 한 효자들이 많았던 데서 유래”, “애막골이라는 이름은 가난해서 집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수양버들 가지를 묶은 ‘유막(柳幕)’으로 집을 만들어 살았던 데서 유래”했다고 썼다. 그리고 손주일 교수는 ‘동막골과 애막골에 대한 지명유래 설정과 문제점’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여러 다른 지역의 사례를 들어 “춘천시 석사동의 ‘애막골’에 대한 우리의 추정은 ‘椳幕(외막)’이 ‘艾幕(애막)’보다는 자연스럽다고 보나, 변이형 ‘외막골’이 조사되지 못한 한계가 있다. 특히 애막골에 대한 기존의 지명유래는 지명전설은 불확실한 채, 전설지명으로서 더 소개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조선지지자료》에서는 한자로 애막동(艾幕洞) 한글로 ‘ᄋᆡᄆᆡᆨ골’이라 표기를 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애막골의 유래가 분분한 것은 모두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면서 비롯했다. 한자는 지명의 뜻을 그대로 담는 경우도 있지만 다만 음의 표기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원래의 지명유래하고 표기수단 한자의 뜻을 곧바로 연결시켜서는 곤란하다. 아마도 그 뜻은 춘천 토박이의 의견이 맞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안화산에 있는 마을이라는 기록도 재미있다. 현재 안화산(鞍靴山)은 정족리와 학곡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안마산(鞍馬山), 아내산, 아나산으로도 불린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학곡리의 옛지명인 두음곡리(豆音谷里, 두름실)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춘천의 지명유래》에는 석사동 애막골에 있다고 했다. 아마도 안화산의 표기가 달랐던가, 아니면 비슷한 이름의 또 다른 산이 아니었을까. ‘지르매장등[안마산]’은 풍수지리설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땅의 지형이다.

그 옛날 상걸리에서 갑둔이고개를 넘어 서부시장까지 가던 애막골 뒷산은 이제 참 많은 춘천시민이 찾는 여가길이면서 운동길이다.

이학주(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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