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 (전 정의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고3 수능이 끝나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첫 알바를 시작했다. “이제 나도 성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용돈을 직접 벌고 싶은 마음에 동네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친구와 함께 햄버거를 만들면서 적은 돈이지만 내 힘으로 버는 기쁨을 누렸다.

대학에 들어갔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장학금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기에 정부 학자금 대출 서비스로 입학금과 생활비를 대출받았다. 학자금을 갚기 위해 휴학하고 길에서 핸드폰을 팔았다. 다른 곳보다 돈은 조금 더 주었지만, 판매 할당량을 못 채우면 퇴근을 할 수 없었다. 또 50만원, 100만원짜리 핸드폰을 말장난 같은 업무 매뉴얼에 따라 공짜폰인 듯 설명해야 했기에 일을 더 오래 하지 않았다. 알바의 성격이 용돈벌이에서 생활비 마련으로 넘어가고 나서는 좀처럼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했다. 평일중 2~3일에 시간표를 몰고 남은 요일을 활용해 알바를 지속했다. 내가 일하고 싶은 날짜를 알바 중계사이트에 입력하면 그에 맞추어 문자가 왔다.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오케이 했다. 종류를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가구배달, 물류 상하차, 전단지 배포, 전시장 부스 철거, 콘서트 무대 세팅, 에어컨 설치 보조, 학교 급식실 급식 보조, 식당 서빙, 매니큐어 라벨지 붙이기, 우편물 포장, 운동기구 조립, 주류박스 밴딩, 학교 책걸상 교체 등등 다양한 일을 했다.

며칠만 보고 말 사람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중계소에 뜯긴 알바비가 아까워서 그랬을까? 사장님들은 참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기계처럼 일했다. 사장님들은 군말 없이 일하는 내가 맘에 들었는지 일 마치고 나갈 때 따로 불러서 돈 더 줄 테니 알바 중계사이트를 거치지 말고 직접 일해보자는 제안을 종종 했다. 좋은 제안이었지만 응할 수 없었다. 공부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버거운데 돈을 좀 더 벌겠다고 일을 늘리면 학업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나의 꿈마저 없어질까 두려웠다.

학부 졸업 후 감히 대학원에 갔다. 돈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일과 병행하며 쓴 논문은 교수님 기대에 못 미쳤다. 돈을 벌다 졸업도 못 하게 생긴 내 처지에 스스로 화가 났을까? 돈 벌기를 그만두고 연장 학기를 신청하여 논문을 완성했다.

통장을 살펴봤다. 빚 2천만원이 찍혀 있었다. 학부 8학기, 대학원 4학기, 총 12학기에서 학생회 장학금과 조교장학금을 제한 나머지 기간 모두 대출을 받았다. 이를 갚기 위해 꾸준히 알바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졸업장과 동시에 빚 2천만원이라는 벌을 받았다. 이제 이 2천만원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내가 선택한 결과였고, 그래서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지만 아직 사회에 첫발도 안 뗀 나에게 2천만원이 주는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제야 알았다. 돈 없고 빽 없고 그리 영리하지도 않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꿈을 꾸기 시작하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생활고’라는 벌을 내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 벌은 어쩌면 청년의 시절뿐만 아니라 꿈을 꾸며 사는 내내 가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꿈을 꾼다. 꿈꾸는 이들에게 벌을 내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내가 벌을 내리는 꿈을, 꿈꾸다 지친 많은 이들과 함께 마음껏 꿈꾸어도 괜찮은 사회를 만드는 꿈을.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