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고안되고 실험된 지 2천년이 훌쩍 넘은 이래, 봉건군주제의 암흑기를 지나기도 했지만, 여하튼 유럽을 필두로 민주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정체와 발전을 반복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개인의 인권과 사유재산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상호 적대적 경쟁을 거듭해왔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양자 간 태생적인 적대감을 도외시한 채, 추상적인 합의를 전제로 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별생각 없이 당연시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샹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중 일부 발췌

민주주의는 현실 사회, 정치제도를 규정하는 가치 규범인 동시에 결코 완료될 수 없는, 다시 말하자면 먼 미래가 현재 시점으로 코앞에 도래한다 할지라도 민주주의는 미완성인 채로 여전히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멈추지 않는 역사적 프로젝트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노력이 일회성으로 끝날 수 없음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다가오는 6월 10일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4·13호헌조치에 맞서, 전국민이 분연히 일어나 거세게 저항한 결과,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의 6·29선언(1987년 789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은 ‘속이구선언’이라 불렀다)의 견인에 시동을 건 국가적 기념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2021.6.10은 군사독재정권을 무력화하고 직선제 개헌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6·10민주항쟁 34주년이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이 땅의 민주화를 갈망하던 수많은 인사들이 희생당했던 정치적 암흑의 시절, 그리고 1980.5.18 광주민중학살 등 굳이 과거로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겠다. 6·10민주항쟁 바로 그해 1월에도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설레발 치며, 오로지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인권은커녕 사람 목숨까지 개똥밭 쓰레기 취급도 안 하던 참혹한 시절이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뭐가 ‘치사’란 말인가 ‘살인’이지)사건과 6·10항쟁 바로 전날인 6월 9일에도 시위 도중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결국 사망한 이한열 열사 사건,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고문과 투옥 등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민주주의를 위해 치른 대가는 그야말로 낭자한 피의 기록이었다.

자유주의를 침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민주주의, 그에 더해 신자유주의를 털끝이라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민주주의, 이러한 민주주의란 도대체 어떤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민생은 지옥이더라도 오로지 자본만의 천국을 선동하는 것인가. 근원적으로 적대적인 기형적 쌍생아, 물과 기름 같은, 따져볼 필요도 없이 어불성설인 자유민주주의를 웅변하는 것인가. 참말이지 아리송하다. 아니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이는 명백한 언어도단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중언부언하자면, 비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원초적인 적대적 관계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화해라도 해서, 그 화해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법·제도화되고, 그리하여 항구적으로 더불어 상생할 수는 없는 것인가. 혹여나 적대적 양자 간 적어도 그런 화통을 기반한 사회라도 되려면, 민주주의 발전이란 늘 그래왔듯이 또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일까. 만약 피를 부르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라면, 민주주의는 과연 누구의 피를 원하는 것일까.

6·10민주항쟁 34주년에 부쳐 다시 민주주의의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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