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춘천에는 임금이 유사시에 머무를 수 있도록 설계된 궁궐이 있었다. 이렇게 유사시 머무를 수 있도록 설계된 궁궐을 이궁(離宮)이라고 하는데, 춘천이궁의 주요 건물이 문소각(聞韶閣)이다.

문소(聞韶)는 “공자께서 제(齊)나라에 있으면서 소(韶) 음악을 들었다[子在齊聞韶(자재제문소)]”라고 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보인다. 공자는 제(齊)에 머무르며 ‘소(韶)’ 음악을 들으면서 석 달씩이나 고기 맛을 모를 정도였으며, 심지어 “음악을 하면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고백하였으니, ‘소(韶)’ 음악이 궁금하다.

‘소(韶)’는 순임금이 만든 음악이며, 9악장으로 이루어졌다[簫韶九成(소소구성)]. 순임금은 고대의 임금으로 태평성대를 이뤘는데, 순임금 본인이 마을에 나가 임금이 누구인가를 물어도 아무도 몰랐으며, 백성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기만 할 뿐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 임금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봉의산(鳳儀山)은 춘천을 위무하는 진산(鎭山)으로, 여기서 봉의(鳳儀)는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춘다”는 뜻이고, 《서경》 <익직> ‘소소구성(簫韶九成) 봉황래의(鳳凰來儀)’가 그 어원이다. 이는 “소(韶) 음악이 아홉 차례[장] 연주되자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뜻이다.

봉의(鳳儀)는 봉황래의(鳳凰來儀)에서 ‘봉황 봉(鳳)’ 자와 ‘춤출 의(儀)’ 자를 취한 것이다. 그래서 춤을 추고 있는 봉황을 계속 머무르게 하려면, 소(韶)라는 음악이 있어야 하고 봉황에게 줄 먹이가 필요했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竹實]만을 먹는데, 춘천은 대나무가 자랄 수 없는 식생대(植生帶)이기에 봉황이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죽림동(竹林洞)이란 지명을 만들었다. 여기에 대바지강[竹田江]이란 지명을 만들어 마실 물도 마련하여주었다.

조선 중기 이민구(李敏求)는 춘천부사 엄황(嚴滉)이 문소각을 짓자 다음과 같이 기문을 써주었다.

“(엄황께서) 공관과 요선당 사이의 땅을 재보고서 작은 각(閣)을 새로 세우고 그것을 문소(聞韶)라고 이름하였다. <중략> 구릉에 막히지 않아서 사방을 시원스럽게 돌아볼 수 있어 산수(山水)의 즐거움을 모두 갖추었으니, 봉의산의 서쪽이 되고 소양강과 장양강의 동쪽이 된다. 높고 가파른 산이 그 얼굴을 드러내고 큰 물줄기가 띠를 두르고 흐르며, 구름과 안개가 일어났다 사라지며, 작고 큰 배들이 모여드니 사계절을 관찰하고 기상의 변화가 건물의 밖 아래에서 펼쳐져서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 몇 발자국 걸어 승경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건물 기둥에 기대어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모두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들어오지 않음이 없다.”(이민구, 《문소각기(聞韶閣記)》 일부)

이민구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이경석(李景奭)은 다음과 같이 문소각 시를 남겼다.

소양정 파하고 문소각에 오르니     昭陽倚罷上聞韶

어렴풋한 붉은 난간 자소궁이라     縹緲朱欄切紫霄

늦봄 맞아 꽃을 두루 찾아다니니     節屬暮春花事遍

강엔 해지자 비단 빛이 일렁이네     江當落日練光搖

몸은 우주에 떠다니니 시름은 일고    身浮宇宙愁還動

봉래산 영주산 가리키니 길 머잖네    手指蓬瀛路未遙

산꼭대기 솔바람이 때맞춰 연주하니    山頂風松時奏樂

구름 끝에 황홀하게 봉황이 날아드네    雲邊怳見鳳飄颻

춘천이 춘천다울 수 있고, 조양루와 위봉문이 예전처럼 그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문소각을 복원한다면 어떠할까! 그리고 복원된 문소각 안에서 도민을 위하는 도백을 모시고 소(韶)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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