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가지 다 떼고 핵심만 얘기해보자. 무한착취의 자유, 오로지 자본만의 자유, 이윤, 돈이 남는 일이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울타리(국경)를 맘대로 넘나들며, 어떤 짓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자본만의 무한자유가 신자유주의다.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법과 제도로 보장해주고, 편법과 반칙도 허용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국가다. 1979년 영국 대처의 대처리즘, 1980년 미국 레이건의 레이거노믹스 이후 신자유주의 진행 과정은 그야말로 폭력적이었다. 빈익빈부익부 사회양극화 실업자양산 무한경쟁 승자독식은 가속화되었고 공동체 의식과 공감 능력은 왜소해졌다. 인간의 존엄은커녕 돈을 숭배하는 사회가 돼버렸고,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별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젊음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 망령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조중동을 위시하여 메이저를 자처하는 유수의 언론들이 연일 반복해서 이준석 나발을 불어대니, 정말로 이준석이 대안일 것도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다.

무한경쟁 승자독식 야만의 DNA를 가면 뒤로 숨긴 채 젊음을 앞세운 정체불명의 망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철학과 이념, 가치와 방향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마라. 젊음에 환호하면 그뿐이지 쓸데없이 뭔 말이 그리 많은가. 이준석의 젊음과 그 젊음에 내재하고 있을 세대교체와 새 정치에 대한 기대와 열망, 그 헛된 망상에 대해 단지 열광만 하면 될 뿐이겠다.

망령에 홀려 벼랑 끝을 향해 가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랴. 이준석이 열변을 토할 때 박수치면 그뿐이겠다. 이준석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어떤 조건에서 공부를 했고, 어떤 정치철학으로 정치를 하고 있든지, 이준석이 대표(?)하는 청년이란 그 자체가 희망인 것이겠다. 그러니 제발 묻지도 따지지도 마라. 그러나 “이준석이 언제부터 대한민국 청년을 대변했는가. 제발 택도 없는 헛소리들 좀 하지 말라”고 항의하는 한 청년의 말은 깊이 새겨들어도 손해볼 일은 아니겠다. 

정치가 밥 먹여주냐? 정치적 무관심들이 시니컬하게 묻는다. 우문이다. 정치는 밥이다. 정치는 삶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생존 그 자체다.

정치인이란 철학과 이념, 추구하는 가치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미리 제시하며 어필하는 것이지, 노땅이니 청년이니 하는 생물학적 나이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일단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이 모든 사회구성원의 삶의 조건을 좌지우지한다. “실력 위주로 인선하고 운영하겠다. 경쟁하라! 모든 판단 기준의 최우선은 실력이다.” 이준석이 누차 강조하는 말이다. 그 말 속에는 무한경쟁 승자독식이 내재돼 있다. 이준석이 정치에 입문한 배경이나, 그 후의 그의 말이나 그가 공부한 과정과 그가 대표하는 정당의 본질까지 차분히 살펴보자. 이준석은 여지없이 뼛속까지 신자유주의자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말 한마디 없다. 오히려 역차별을 선동하며 젠더 간, 세대 간 불신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반시대적 선동이 정치불신, 그 칙칙한 바람을 타고 잠시 인기몰이하는 듯하다.

이준석의 본질을 보지 않고 현상만 본다면, 필연 정치적 오판을 불러올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실패했다’라는 말은 권력투쟁의 장인 정치판에서 신자유주의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거세해버린 공동체 의식을 원기회복시키고 상호 공감 능력을 배양할 때다. 그러한 정치철학을 갖춘 정치세력만이 차기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또 그렇게 돼야만 더불어 지속가능한 사회, 한 단계 발전한 민주주의가 순풍에 돛 달고 더 넓은 바다로 순항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이여, 성난 민심의 파도에 좌초하지 않고 살아남고 싶다면, 여야를 불문하고 정신 바짝 차려라. 신자유주의를 땅에 묻고, 그 무덤에 저주의 묘비를 세울 때다. “다시는 부활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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