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혹시…….”

예상을 하기라도 한 듯 상현의 무심한 눈가에 알 듯 말 듯 미소가 어렸다. 

“혹시, 그림 속 여인의 발에다가도 밧줄을 묶어놓았나?”

알듯 말듯한 미소가 더욱 모호해졌다.

“매형이 작가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인의 발에다 밧줄을 묶겠습니까, 풀겠습니까?”

박호민은 상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창수의 <사랑을 그리다>. 소설 속 강렬했던 장면 중 하나. 천재 화가 상현은 낭세녕의 <백해청도(白海靑圖)>의 흰 매에서 여인의 홍조 깃든 새하얀 살결과 우아한 자태, 자유를 상실한 운명, 그 정체를 알리는 시치미 그리고 욕망의 구도를 보고자 했다. 그의 예술 지원군이자 매형 박호민이 음란을 감추지도 않고 정결을 해쳐서도 안 되는, 새로움을 넘어선 무언가를 담고 있을 춘화(春畫)를 보려고 들어가다 말고 추측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백해청도>를 검색한다. 상상 속의 그림인가. 낭세녕은 중국드라마 <여의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청조 배경의 드라마에 웬 서양인 화가가 나오나 찾아봤던 것. 여의 저우쉰이 <바람의 소리>의 샤오멍이었던 것을 알아챈 것을 스스로 대견해 했던 것만큼 이 이상하지만 낯설지 않은 이름을 만난 것 또한 그랬다. 본문에는 비록 모사도였으나 상현과 박호민이 본 그림 또한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았다. 검색결과는 하창수 소설<정인(情人)>이 전부였다.

대신 <시치미를 단 매>와 <숭헌영지도(嵩獻英芝圖)>가 나왔다. <시치미를 단 매>는 황금비단을 깐 횃대에 시치미를 달고 발목에는 가느다란 밧줄이 묶인 채 몸을 아예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고 <숭헌영지도>의 흰 매는 ‘화려한 색상과 문양’의 횃대가 아닌 붉은 영지가 드문드문 꽂힌 바위산에 몸은 정방향이고 오른쪽으로 고개만 살짝 돌리고 있다. 이 흰 매의 뒤태가 압권이다. 물론 밧줄도 시치미도 없다. 이 두 그림이 합쳐지자 비로소 <백해청도>가 보였다.

어느새 나도 거기에 여인들의 나신을 앉혔다. 사랑에 애달프지만 내색하지 않는 여인, 늘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의 곁을 지키는 여인, 자신의 삶보다 남자들의 삶을 더 가엾게 보는 여인, 그리고 음란과 기품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을 묻는 여인……. 밧줄은 발치에 얌전히 풀어놓았다. 새하얀 발목에 쉬 지워지지 않을 자국만 남긴 채.

사랑. 사랑의 아픔에 멍들고 치이던 시절이 먼저 스쳐 갔다.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청춘의 사랑은 강렬하고 짧았다. 죽음의 공포 앞에 선 나를 뒤에서 어설프게 안아주던 당신. 빠르게 뛰는 당신의 심장이 고스란히 내 등을 타고 들어왔을 때 사랑이, 당신을 두고 가는 거라던 허수경의 시가 떠올랐다. 두고 가는 사랑도 사랑임을 뒤늦게 안 당신의 연인이 이제야 묻는다. 사랑이 무어냐.

조현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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