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걸리 광산골 가는 늘목고개

품걸리 가는 길은 정말 낯설었다. 춘천의 낙원이면서 오지였다. 조용히 나만의 삶을 살면서 세월 보낼 수 있으니 낙원이요, 교통이 불편해 접근하기 어려우니 오지였다. 내비게이션은 우리에게 느랏재를 넘게 했고, 갑자기 산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산속에서 머물게 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시야가 툭 틔면서 첩첩이 산 능선을 넘고 넘는 멋진 광경이 다가왔다. 그리고 저 멀리 가리산이 한눈에 볼 수 있게 선명히 드러났다. 이 지역 사람들의 전망대였다. 새해 해맞이 행사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와, 저런 멋진 광경이!”

그러나 아직 품걸리는 멀었다. 산속 길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드디어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옛 학교를 개조해 만든 펜션과 몇 채의 농가가 우리를 반겼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 앞을 휘돌아 소양강댐으로 들어갔다. 마을사람의 치성터였던 칠성목은 아직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973년 소양호에 물이 차면서 마을의 주요 부분은 물속에 잠겼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어르신! 품걸2리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나요?”

우리는 그냥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품걸리마을회관으로 내비게이션을 맞추었더니 품걸1리로 우리를 안내한 것이다. 

“저기는 소양호로 가는 길이고요. 그 오른쪽으로 해서 산을 넘으면 됩니다. 옛날 광산 때문에 만든 길이 계속 나 있어요.”

“광산길….”

그랬다. 일제는 가리산에서 중석을 캐서 산길로 운반해 춘천역까지 실어 날랐다. 꼬불꼬불 산의 형세를 따라 길은 잘 나 있었다. 임도는 분명 아니고 신작로였음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는 산길이었다. 걷지 않고 차를 타고 가도 기분 좋은 그런 길이었다. 가다가 딸기가 있으면 손을 뻗어 따먹을 수 있었다. 높다란 나무가 하늘을 가려 마치 굴처럼 빠져나가면 뭔가를 잉태할 듯한 길이었다. 그곳엔 유래가 쓰여 있었다. 

“가리산에 중석광산이 있어서 이를 채취, 운반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강제로 건설하도록 했던 길이다.” 

이 길을 ‘늘목고개’라 한다. 한자로는 판항현(板項峴)이라 하고, 또 판창고개라고도 한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현명(峴名)이며 한글로는 ‘널목고 ᄀᆡ’라 하고 한자로는 판항현(板項峴)이라 하고 말걸리에 있다고 했다. 판항현 너머 광산이 있어서 판항광산(板項鑛山) 또는 가리산에 광산이 있어서 가리산중석광상(加里山重石鑛床)이라 한다고 《춘주지》에 전한다. 그리고 가리산중석광상은 “동면 품걸리 남측사면에 위치한다. 8·15 이전에는 대당광산(大堂鑛山)이란 명칭으로 활발하게 개발되었으나 현재는 휴업중이다”이라 하고, 판항광산은 “동면 품걸리 가리산 서측 약 2km 지점에 위치한다. 8·15 이전에는 선광장(選鑛場)을 설치하여 활발하게 개발하였으나 현재는 휴업중이다” 하고 광물의 내용을 기재했다. 

지금 마을사람들은 이곳 지명을 광산골 또는 광산동(鑛山洞)이라 부른다. 두 개의 중석광산은 가리산 아래에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강제 동원돼서 광물을 캐고 산을 뚫어 길을 내었다. 지독한 일제의 탄압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슬픈 역사를 품고 길은 나를 넘게 하였다.

이학주(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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