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일 기자

장면1, ‘삼성가, 한국의 ‘메디치가’로 거듭나나’, ‘이건희의 선물, 기부 역사 새로 쓰다’, ‘투어족 생기고 온라인 감상도… 전국 달구는 이건희 컬렉션’, ‘한국판 빌바오 기대감에 이건희 미술관 막판 유치전 치열’, ‘이건희 미술관 결국 서울로, 지자체 일제히 강력 반발’,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벌써 예약 매진 행렬’

장면2, ‘학교·도서관·체육시설·공연장, 28만의 시민들이 사는 도시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시설이다.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자처하는 춘천에도 다 있다. 그런데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미술관이다. 심지어 대형마트도 4곳이나 있는데 말이다. 기본이 안 된 도시이다’, ‘이영일 화가를 시작으로 변준모·이수억·장운상 등 수 많은 작가가 배출되었지만, 작품도 연구 자료도 많이 사라졌다. 시민들은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첫 장면은 ‘이건희 컬렉션’ 혹은 ‘이건희 미술관’을 둘러싸고 최근까지 주요 언론이 쏟아낸 기사 제목이고, 아래는 최근 열린 ‘춘천시립미술관’ 건립 공청회에서 나온 지역 예술가들의 호소이다. 한국에서 미술관이 이렇게 이슈가 된 적이 있었나? 하지만 미술관 앞에 붙은 이름 하나로 인해 관심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문체부는 지난 4월 이건희 회장의 유족 측이 문화재와 미술품 총 2만3천181점을 기증한 이후 활용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전담팀과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를 운영해왔고, 최근 이른바 ‘이건희 미술관’ 후보지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와 국립현대미술관 인근 송현동 부지 2곳을 결정했다.

‘이건희 컬렉션’은 국보급 고미술품을 비롯해 피카소·모네·자코메티·이중섭·김환기·이우환 등 서양과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아우르고 있어서 세계에 손꼽힐 미술관을 열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 이 작품들이 시장에 풀릴 경우 한국에는 이 정도의 작품을 살 수 있는 컬렉터나 기관이 없기에 해외 유출 가능성이 높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품 구입 예산은 48억원이고 미술은행 예산 28억원을 합치더라도 1년에 80억원을 넘지 않는다. 1천억이 넘는다는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하나도 구입할 수 없는 예산이다. 상속세 물납제 도입이 수긍되는 이유이다.

또 ‘이건희 컬렉션’ 중 박수근 화가의 작품이 전시된 양구 박수근 미술관에는 평소보다 2~3배 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간다고 하니, 미술관 유치에 탈락한 강원도를 비롯한 여러 지자체의 반발도 이해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밀려온다. 명성 높은 예술가와 작품에 관심 갖는 일이야 인지상정이니 그렇다 쳐도, 미술관 건립마저도 재벌의 이름을 달고서야 지자체와 언론, 여론이 들썩이는 현실 말이다. 심지어 법에 따라 모든 국민이 내야 하는 상속세임에도 일부 언론은 그 액수를 과장해가며 찬사를 보낸다. 고가의 미술품을 재산은닉의 수단으로 활용한 점은 수면 아래로 사라졌고 은근슬쩍 이재용 사면론까지 더하고 있다.

강원도는 도립미술관이 없다. 또 법정문화도시로 지정된 강릉, 원주, 춘천 세 곳 중 강릉에는 시립미술관이 있고, 원주는 2023년에 준공될 예정이다. 춘천만 시립미술관이 없다. 

지난해 10월 대룡산 근처에 자리한 화가의 집이 화재로 전소됐다. 인명피해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작가의 소중한 작품들이 모두 소실되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화재로 사라진 건 작가 본인의 작품만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작가가 보관해오던 고(故) 정연삼 화가의 작품 300여 점도 불에 타 사라졌다. 미술인들은 암울한 탄광촌의 현실과 광부들의 삶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묘사한 정 작가의 작품이 언젠가 크게 주목받으리라 기대했기에 안타까움이 더 크다. 시립미술관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지역의 문화정체성 확립과 발전, 시민의 문화향유에 있어 아주 큰 차이를 가져온다. 물론 시립미술관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지역의 모든 작가와 작품을 소장·보존·연구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역 예술의 정체성을 온전히 정립하고 미래세대에게 이어주는 기본적인 역할이라도 해낸다면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문화적·산업적 가치 창출을 통한 문화강국 이미지 강화’. 문체부가 내세운 ‘이건희 기증품을 활용하는 4가지 기본원칙’ 중 한 가지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화강국은, 피카소와 자코메티의 작품을 소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재능 있는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고 시민과 나눌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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