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 (전 정의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에 찾아온 지도 1년 반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만나더라도 최소한의 대화만 하고 빨리 헤어지는 비대면 생활방식이 미덕이 됐다. 백신이 나왔지만, 부국 빈국 간 백신 불평등과 변이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인해 코로나19가 쉬이 잠잠해질 것 같지 않다. 비대면 생활방식, 사회적 거리두기를 언제까지 유지해야 할까? 참으로 답답한 요즘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코로나19가 있기 전에도 청년세대는 비대면 사회를 겪어왔다. 

한국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지난 수십 년간 수출중심의 고도성장을 했지만 1997년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면서 IMF에 구제금융신청을 했다. 노동자는 대량해고 됐고 비정규직이 대규모로 확산하였다. 외환위기를 넘기고 경제가 계속 성장하는 듯했으나 그 성장도 점차 둔화했고, 그사이 들어온 초국적 대기업과 투기자본은 한국경제에 횡포를 부렸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봉한 정부와 경제관료들이 대자본의 횡포를 방관 내지 부추기면서 국토는 난개발로 황폐해졌고, 공공부문에 있던 산업들은 점차 민영화됐다. 현재 한국사회는 최악의 빈부격차, 최악의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10대부터 30대까지, 지금의 청소년·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경쟁과 승자독식 체제 아래에서 길러졌다. 영유아 때는 지능검사를 명분으로 또래와 성장을 비교당했고, 한글을 다 배우기도 전에 영어 조기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트랙 위에 올라간 경주마가 됐다. 칠판 위에 걸린 교훈은 ‘협동’이었지만, 교실을 지배하는 공기는 ‘경쟁’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옆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잔인한 경주트랙에서 청소년들은 양옆의 시야를 가려놓은 경주마처럼 옆 친구와 대면하지 못한 채 앞만 보며 달려야 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청소년들, 청년들에게 인간미와 연대, 협동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진지한 고민과 힘겨운 성찰의 결과이지, 이 사회가 책임지고 쥐여준 것은 아니다. 이 사회는 공교육의 목적을 ‘참되고 바른 인간’이 아니라 ‘잘 팔리는 인력’에 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공교육을 경마장으로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또래 친구와 대면할 기회를 잃은 비대면 인간이 돼, 낮은 자존감과 고립감을 힘겹게 버티고 청년이 됐는데, 주지하듯 경쟁은 더 노골적으로 이들을 휘감아버린다. 경쟁으로 친구들과 강제 비대면 당한 청년들이 간신히 취업에 성공해도 이들을 기다리는 건 주류사회와 철저히 비대면 당한 채 행해야 하는 비정규 노동이다. 플랫폼 대기업은 겉으로는 4차산업혁명을 떠들지만, 노동법을 교묘히 비껴가며 노동자를 착취한다. 서비스 대기업은 여성청년들에게 더 많은 상품화를 요구한다. 사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정규직으로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하는 이 청년들에 의해 지탱되지만, 이들에게 주류사회는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자본의 품위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이들을 사회 저 밑바닥에 격리하고 계속 기득권을 누린다.

한국사회는 청소년들을, 청년들을 대면해야 한다. 청소년, 청년만이 아니라 불평등한 시스템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제대로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선 승자독식 무한경쟁이 아닌 협동과 평등의 백신으로 이 사회를 살려야 한다. 코로나19 비대면 사회는 당분간 계속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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