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네팔 유학생 아내로 들어와 박사학위 취득
어엿한 직장인 레누까 “봉사하면서 더 많이 배워요”

레누까(Renuka, GHMIRIE)는 한국 나이로 올해 45세다. 강원대학교 1학년 아들 술라브(20)와 유치원생 딸 수딕차(6), 건국대학교 조교수인 남편 비멀씨와 춘천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2005년 강원대학교에 공부하러 들어온 남편을 따라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강원대학교 관광경영학과 석·박사과정 후 연구원으로 2년, 중소기업에서 반일근무를 하다가 지난해부터 헤드셋 제조회사 ㈜MIJ에서 해외 마케팅부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춘천에서 산 세월이 15년이라 한국말로 소통하는 것은 물론, 만나는 장소를 찾아오는 데도 아무 막힘이 없다. 항상 웃으며 이야기하고 긍정·적극적인 성격이라도 지금까지 타국생활이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끊임없이 도전한 ‘춘천댁’ 레누까의 이야기를 들었다. 

춘천에서 15년을 산 네팔인 레누까

먼저 7월에 네팔에서 입국한 이들 이야기를 해 볼게요. 무사히 들어온 아들 때문에 일상이 행복하다고 들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아픔이 있었나 봐요?

아들은 초등학교 때 인도로 갔어요.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기가 수월치 않아 인도 친정집 근처 기숙학교로 보냈어요. 인도는 학교와 집이 멀어 대부분 기숙학교를 다녀요. 저도 그랬고요. 학교적응을 잘 못해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아들은 한국에서 어려운 상황에도 일하면서 학비를 대주는 부모 생각에 공부를 열심히 했나 봐요. 지난해 이곳저곳 고민하다가 강원대학교에 입학했고 늦어도 올해 초까지 입국을 해야 했는데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 비자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네팔의 호텔, 친구 집. 친척 집들을 전전하며 아이가 혼자 고생을 했어요. 

그래도 봄부터 강원대학교 수업은 시작했어요. 저와 남편이 학교 수업내용을 파일로 보내고 아들이 그곳에서 과제를 해 다시 한국으로 보내 제출하고 하는 식으로요. 몸도 힘들었지만, 아들이 힘들어도 올 수 없고 제가 갈 수도 없는 상황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 1년의 세월이 저한테는 지옥 같았죠. 팔방으로 알아봐도 비자는 계속 거절되고…. 그러다가 지난 7월 10일에 비자가 나왔고 15일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이제는 잠을 자요. 코로나에 걸리진 않을까, 지친 아들이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1년 동안 잠도 못 자고 눈물만 났어요. 지금은 이렇게 말도 많고 웃으면서 지내는데….

레누까의 단란한 가족

다행입니다. 초등학교부터 인도에서 공부한 아들과 함께 살게 된 것이 거의 10년 만이겠네요. 저도 아들이 하나 있지만, 그 보고픔과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이 안 되네요. 왜 함께 가지 않으셨고, 어떻게 버티셨나요? 

아들 술라브가 네 살 때 한국에 들어오고 초등학교에 다녀도 한국어 서툰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강대 교직원 소개로 알게 된 ‘나래어린이집’ 원장님이 사정을 봐 주셔서 특별수업비만 내고 2년간 어린이집을 보냈고, 지금도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충희 선생님이 한국어를 가르치며 키워주시다시피 했어요. 또 후평동에 있는 정도체육관 관장님이 무료로 태권도도 가르쳐 주셨고요. 그래서 저는 공부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할 수가 있었죠. 너무나 좋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저는 늘 감사하고 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에 간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 아홉 살 때 인도로 보내게 된 거죠. 인도는 어차피 기숙사학교고 외박도 잦지 않아요. 또 저는 2008년에 시작한 공부도 계속해야 했기에 남기로 했어요. 

어느 날 홍천에 있는 ‘명동보육원’에 가서 봉사하는데 술라브 또래 남자아이에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밥도 같이 먹고 옷도 사주고 마음을 주면서 아들처럼 지원해 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받은 사랑이 많으니 나누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더 위로를 받았을 거예요. 2015년에 생각지 못하게 아기가 생기면서 그 아이를 더 이상 찾아가지 못했어요. 아기를 누구에게 맡기고 갈 수도 없고, 애기를 데리고 가면 혹여나 상처를 받을까 두려웠거든요, 최근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어엿한 성인이 되어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잘 다니고 있다고 해요. 지금도 많이 생각이 나요. 

그때 자전거도 열심히 타셨고 외국인을 위한 라이딩 프로그램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 더 힘들었어요. 에너지를 쏟으려 자전거도 타고 산도 많이 올랐었어요. 친구들을 모아 팔봉산, 삼악산을 자주 갔는데 한 달에 열 번을 간 적도 있어요. 자전거로 부산까지 간 적도 있고 인천까지 간 적도 있어요. 춘천엔 좋은 라이딩 코스들이 많은데 외국인들은 잘 몰라요. 유학생들은 정보도 없고 시간도 안 되고 여력도 없어요. 그래서 유학생들을 위한 외국인 자전거 타기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강원도나 시의원들 도움으로 경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어요. 해마다 진행하려 했는데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연기했고 날씨 때문에 취소하고 그러다 보니 재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2013년 레누까가 추진한 외국인 자전거 프로그램에 참여한 외국인 유학생과 친구들   

주말이면 함께 모여 고향 음식과 레저 활동을 하던 인도, 네팔 유학생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예전엔 한 40명 정도가 주말이면 여기저기 모여 음식도 해 먹고 축구도 하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전혀 못 하고 있어요. 코로나 이후 외국인을 보는 시선도 달라진 거 같기도 하고, 인도가 코로나 상황이 심각하다 보니까 스스로 위축되는 사람들도 있어요. 마스크도 잘 쓰고 방역기준을 잘 지키면서 친구들을 가끔 만나는데 예전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외롭고 힘든 친구들이 많을 거예요. 예전처럼 함께 모여 고향 음식을 나누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한국어, 영어, 인도어, 네팔어가 되다 보니 위급상황에서 그녀를 찾는 외국인들이 많다. 유학생 아내가 큰 병이 생겨 3천만 원 상당의 수술비가 나왔을 땐 모금 운동도 해봤다. 그리고 지금까지 다섯 번의 출산을 도운 것 같다. 한국에 오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레누까를 도운 것처럼 그녀도 지속적으로 도울 예정이다. 그러한 일들이 가끔 힘들 때면 남편은 말한다. “당장 힘들고 손해인 것 같지만 우리가 더 많이 배우고 있다, 우리가 더 많이 받고 있다”라고. 

생각해보면 고마운 사람들이 수없이 생각난다. 그 인연이 오래되어 가족처럼 지내는 한국 언니들도 있다.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은 춘천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유은숙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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