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등굣길에 고교생 아이가 이어폰을 안 챙겼다며, “오늘 하루 어떻게 견디지?”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수업을 보고 듣고 하자면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학생들 방해하지 않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려 하나보다라고 생각하며 지나간 적이 있다. 거리에서 혼자 대화하거나 차가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 알고 보면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사람들이다. 원하는 소리만 듣고 다른 소리는 차단하는 시스템이다. 따지고 보면 귀를 막는 셈이다. 소통이 단절되고 있다. 

의사소통의 기본은 상호작용이다. 남의 말을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코로나19로 수업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보고 듣는 시청각 수업이 많아졌지만, 우리는 수업이나 강의를 받는 것을 여전히 듣는다고 표현한다. 경청(傾聽)이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요즘은 남의 말을 막거나 안 들으려 하는 소통단절의 시대가 아닌가 여겨진다. 

민주사회에서 소통의 능력은 지도자의 주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얼마 전 버스 해고 노동자 시위 현장에 찾아온 시장은 대화로 문제를 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자 대화를 하기 위해 시장실을 찾아가면 막아서는데 어떻게 대화하느냐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만날 수 없으니 대화가 이루어질 리 없고, 대화가 없으니 소통될 리가 없을 것이다.  

시청에는 시민소통담당관이라는 직책이 있다. 새로운 직제를 만들 정도로 시민과의 소통을 중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시장과의 직접 소통이 줄어들고 담당관을 통해서 걸러진 소위 마사지 된 간접 정보가 시장에게 전달될 위험도 있겠다. 시장 만나기가 힘들면 대화도 줄어들고, 그러면 소통이 안 이뤄지는 게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얼마 전 시민소통담당관이 한 언론사의 보도를 둘러싸고 사실이 왜곡되었다고 정정 보도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결과는 정정 보도도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담당관의 사퇴로 끝났다. 작으나마 기자 권력과 시청 권력이 맞붙어 일어난 일이다. 이 힘겨루기에 시도 기자도 잘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 과정에 시민은 없고 소통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통은 상대가 있는 상호작용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서 마음을 읽고 나누는 일이다. 그래서 소통에는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을 나눌 의지가 있을 때 협력도 가능한 것이다. 의사소통이 왜곡되고 단절되어가는 시대에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덕목은 그래서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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