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오늘도 손가락이 바삐 움직입니다. 눈으로 도로록 글자들을 읽어 나갑니다. 짧은 영상과 사진을 보고 ‘하트’를 누르고 ‘좋아요’를 날리며 한 컷의 이미지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린 언제부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만나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거리의 시간을 공유하고 ‘대화(?)’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만나서 할 일이 줄어든 건지 그동안 했던 일들이 만나서 할 필요가 없었던 건지, 눈을 보고 상대방을 살피며 대화를 하고 싶은데 ‘침묵(?)’이 가장 확실한 대화법이 되는 세상이 오고 있는 걸까요? 손가락은 계속 바쁘고 말입니다. 이번엔 관객과 만남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공연을 소개하려 합니다.

김아라는 극단 ‘무천’을 이끌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여성연출가입니다. 침묵극으로 유명한 그녀는 일본의 전설적인 작가 오타 쇼고(1939~2007)의 침묵극 4부작 [물의 정거장], [바람의 정거장], [모래의 정거장], [흙의 정거장] 시리즈를 무대에 올렸으며, 비대면의 세계에 도래한 이 시점 <문화비축기지>라는 야외무대에서 파격 연극의 대명사인 <관객모독>과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원작자인 오스트리아 극작가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의 침묵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Die Stunde, da wir nichts voneinander wußten>을 선보였습니다. 페터 한트케은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1992년 발표한 이 공연은 160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광장의 노숙자가 그곳을 지나는 세상 속 인생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 말이 없이도 지금의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다양한 발걸음과 옷차림의 행인들 모습은 현실적이기도 하고 비현실적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내가 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공연은 20여 명의 배우가 320개 넘는 의상을 갈아입으며 무대 위 ‘지금’이라는 시간 속을 말 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극 중 광장이라는 공간에 놓여진 배우들의 수많은 걸음들과 발가벗고 태어난 인간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옷으로 대사 없이 2시간여의 시간을 책임집니다. 그 지나는 발걸음들에는 시대의 상처와 흔적의 삶이 묻어 있습니다.

공연이 이루어진 곳을 소개하자면 서울 한복판 석유 비축기지로 활용되어온 곳이 도시 재생 계획을 통해 ‘문화 비축기지’라는 이름으로 탄생하였고, 지금은 친환경, 재생,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생태문화 공원을 표방하는 공간으로 실험적인 다양한 작품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번 연극에서는 극 중 광장 야외공간 활용은 적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공연장을 접하면서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춘천이 도시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을 덮어 버리는 또 다른 파괴가 아닌 자연에 놓여지는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가을입니다. 춘천엔 공연도 많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침묵하더라도 눈빛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변유정(연극 연출·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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