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서(소설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새로운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학생들에게 교장 선생님이란 애국 조회 시간에만 잠깐 보는 존재이고, 일주일에 한 번 지루한 훈화 말씀을 운동장에 서서 잠시 견뎌주면 되므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런데 이번 교장 선생님은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도 유난히 많았다. 학생들은 복도에서 뛰다가 교장 선생님과 마주치면 지레 겁을 먹었지만, 선생님은 다정한 말투로 넘어질까 걱정을 해 주셨다. 그 외에도 교외 대회에서 상을 타온 학생들을 교장실로 불러 ‘학교를 빛낸 어린이’라는 이름을 붙여 칭찬해주시곤 했다. 내가 교외 대회에서 타온 상이란 글짓기상이 전부였지만, 그렇게 나는 두어 달에 한 번쯤 교장실에 가 보게 되었고, 전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이름을 아는 학생 몇 중 하나가 되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다가 교장 선생님과 마주치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 그때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표정에 괜히 으쓱해지곤 했다.

 나는 일곱 살 때 선천성 심장병 진단을 받았다. 심방 사이에 작은 구멍이 있다는데, 성장하면서 자연히 막힐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해서 해마다 검사를 받고 있었다. 별일 없이 몇 년을 지냈는데, 6학년이 되어 검사했을 땐, 심장 사이에 난 구멍이 커졌다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우리 집엔 그런 수술비가 없을 게 뻔하고, 아직 스무 살은 멀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엄마의 한숨과는 달리 나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여름 방학을 보냈다. 그런데 막상 개학하니,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실컷 노는 게 덜 억울할 것 같았다. 허무함에 빠져 터벅터벅 걷는 하굣길에 동사무소 앞에서 교장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어떤 아저씨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자세로 무언가 사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네와 학교가 전부였던 어린 나에게 가장 높아 보였던 교장 선생님이 사정하는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중 선생님이 나를 먼저 보고 부르셨다. 선생님은 그 아저씨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 아이라고 얘기했다.

 내 일을 알게 된 교장 선생님은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기관이나 단체들을 방학 내내 직접 찾아다니셨고,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를 찾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더 어려운 친구들을 돕기 위해 기초 생활 수급자(당시 영세민)의 경우에만 지원을 해 준다고 했다. 전 국민 의료보험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수술비는 거의 열 배 차이가 났다. 이에 교장 선생님은 동사무소를 찾아가, 동장님께 내 사정을 얘기하며, 우리 집의 조건으론 안 되는 영세민 카드를 만들어 달라고 동장님께 부탁하고 계셨던 거다. 동장님은 수술 후 반납하는 조건으로 영세민 카드를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요즘 들어 그때 나를 살리겠다고 애쓰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부쩍 생각난다. 한동안은 살아있음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 일을 잊고 지내다가, 다시금 그 일이 생각나는 건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겐 아직 써야 할, 또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이다.

 1987년 남춘천국민학교에 근무하셨던 이만우 교장 선생님! 감사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찾아뵙진 못하더라도 선생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며, 저 또한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삶에 가끔씩 디딤돌이 되어주며 그 은혜를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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