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화운동가, 춘천을 위한 사회운동가 조영춘 목사

지인에게 인터뷰이 추천을 받았다.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며 갖가지 이야기를 알아서 술술 풀어내실 분이라는 실마리만 던져 주고 연락처를 보내왔다. 소개자를 믿고 사전 준비 없이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이 편치만은 않았다. 

한가위처럼 풍성하고 너그러운 웃음을 지며 인터뷰 장소에 들어선 조영춘(64) 목사님과 그렇게 첫 대면을 하게 됐다. 이야기의 실마리는 내가 아닌 목사님이 푸셔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바로 물었다. 지인은 무슨 이유로 목사님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직접 말씀해 달라고.

“글쎄요 저는 정말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는데…. 뭐 딱히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분이 저를 추천한 이유는 제가 춘천에서 성시화운동을 오랜 기간 해 왔기 때문일 거예요. 성시화운동이란 말씀과 복음을 교회뿐만 아니라 전 시민과 함께 나누고 전파한다는 운동이에요. 저에겐 운동의 일환으로 춘천을 깨끗하고 행복한 도시로 만들어야겠다는 비전이 생겼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죠. 

그래서 15년 전 춘천시민이 염원하던 혁신도시유치운동을 함께 하게 됐어요. 당시 원주와 춘천은 지역감정이 생길 정도로 팽팽한 유치전이 일었고 각 지역대표 교수진 14명으로 구성된 선정심사단이 꾸려졌어요. 그러나 원주 쪽 교수들은 원주에게 최고점, 춘천에 최하점을 주는 편파적이고 불공한 심사결과를 냈고 혁신도시가 원주로 가게 됐어요. 이에 화가 난 춘천시민들은 도청에서 항의시위를 이어갔죠. 중장비 3대를 동원해 도청 입구를 막기도 했고 계란을 투척하기도 했어요. 제가 데모를 좀 잘합니다(웃음). 그러나 나중에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당시 김진선 도지사는 애초부터 혁신도시는 원주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춘천시장과는 협조하기 어려운 갈등 관계에 있었던 거 같아요”

당시 들끓는 춘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김 전 지사는 G5 춘천개발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는 약 5차례 김 전 지사와 독대하면서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과 행정력 투입 방안을 구체적으로 듣고 수긍했다. 하지만 당시 유종수 춘천시장은 강원도와 자금을 매칭시켜 사업을 성사시킬 마음이 없었고 잦은 갈등으로 사업들이 유야무야 없어지게 됐다. 원주는 그 반대의 조건으로 지금까지 개발의 시너지를 얻어가고 있다. 

이렇게 시민을 위한 프로젝트들이 정부와 조직, 정치인들의 알력과 협상으로 그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시민운동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춘천을 위해 또다시 강원외국어고등학교와 태권도공원 유치를 위해 앞장섰다. 

“2007년 강원외국어고등학교 유치추진위원회가 결정되고 운영학교법인으로 안식일교단의 삼육재단이 잠정 결정이 됐어요. 저는 종교재단이 외국어고등학교에 뛰어든다는 것이 불만이긴 했지만, 강원외고는 꼭 춘천에 유치하고 싶었는데 최종단계에서 춘천시가 투자금액을 줄이며 이 또한 고배를 마시게 됐죠. 이 과정에서 시장이나 교육감 간의 내부조율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태권도공원도 마찬가지예요. 사업비 1천억의 태권도공원이 대룡산 아래 자락 부지에 들어서면 수도권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도 있고 하여 매우 희망적으로 보였는데 동계올림픽유치권 협상으로 그 공원은 무주로 가게 됐어요. 저는 또다시 시민운동에 회의를 느꼈고 시민들의 의견 반영이 잘되지 않는 이유를 고민하게 됐죠”

혁신도시를 원주로 내정하고 있던 김 전 지사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원주는 300여 명의 회원이 있는 원주포럼이 있었고 시민들은 포럼을 통해 기관장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피력했다. 하지만 춘천은 수용하기보다 배척하기 바빴고 개인주의가 강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민 의견을 잘 반영하는 포럼을 만들고자 ‘창조도시포럼’을 만들어 전문가와 시민을 모았다. 이 포럼은 약 7년간 유지됐다. 하지만 단순히 사회를 위해 헌신하기 위한 모임이라 응집력이 약했다.

 “혁신도시, G5프로젝트, 강원외고, 태권도공원 등. 제가 유치하려고 한 것은 다 실패했어요. 제가 그리던 비전이 퇴색됐고 시민들은 사분오열 갈라졌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뒤 역할도 매번 있었죠. 이러한 일들을 통해 자만하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고 지역 도시를 살리는 길은 멀다는 걸 느꼈어요. 비옥한 땅을 독일에 빼앗긴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북해의 황무지를 안고 정신과 땅, 그리고 사람만으로 나라를 다시 살려낸 덴마크의 3애(愛)운동이 생각납니다. 마찬가지로 춘천을 살리는 것도 사랑과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사업의 성공보다 이웃을 위한 헌신의 마음으로 많은 사회운동을 해온 스토리가 있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됐구나’ 하는 생각과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업들이 춘천을 비껴갔던 기억이 났다. 내가 기억하는 한 혁신도시유치전이 가장 치열했던 같고 유치가 실패하자 상실감에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 시작했다. 그 현장에 앞장선 이들의 앞뒤 이야기를 생생히 들어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6월에 심정지로 사망한 임지호 요리사를 아느냐고 물었다. 건강식자재로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 희망을 전하던 요리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에게도 쉽게 잊히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2주 전, 인터뷰 시점에서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은 6월 초에 그도 심정지가 왔다고 한다. 아버지 동생 등 가족력이 있어 운동을 꾸준히 하며 관리해 왔기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탁구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리곤 8분간 심정지가 왔고 모두 저를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심폐소생 끝에 다시 살아났고 하루 반 만에 의식을 찾았어요. 그 시간 저는 긴 여행을 하고 온 듯해요. 천국을 다녀온 거 같은 느낌이랄까. 그 이후 저에겐 모든 일상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감사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심정지로 사망한 임지호의 삶이 그에게 투영된다고 한다. 그는 나누고자 했다. 힘든 이웃에게 생명의 음식을 나누고 희망을 전하려 했다. 큰 영향력이 있기보다 따듯한 이웃이 되고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요즘, 영춘(永春)이라는 이름은 춘천에서 영원히 살라는 의미로 동사무소에서 얼떨결에 지어진 이름이지만 희망의 상징인 ‘봄이 길게 이어진다’는 뜻으로 다시 해석된다고 한다.

유은숙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으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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