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시민기자 (시인)

“우리는 너무 오래 사귄 것 같아.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이제 나에게도 나의 기호라는 것이 있어. 너무 오래된 것은 나 뭐든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랬다면 교진은 내가 싫증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연애에 빠져서 설탕물 속을 헤매는 파리가 되기 싫다는 것이었다. 육십 살이 되어도 정글 속의 고릴라와 키스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진정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는지 지금도 확신할 수는 없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나는 언어의 함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말해놓은 다음에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다른 언어는 없다. 

배수아 장편소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2000년 작. 책장을 정리했다. 눈에 띄는 제목을 집어 들었다. 구입 당시에도 스토리보다 제목이 한몫했을 것이다. 연인이 싸우고 헤어질 때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 어쨌든 누군가에게 지겨워진다는 건 슬픈 일이다. 피한다고 피할 수도 없는. 밀레니엄을 지나는 한 세대의 자화상을 볼 수 있는 소설이다. 결혼관이 다른 교진과의 진전없는 관계를 정리하는 대사. 말을 부드럽게 풀었지만 결국 나는 이제 니가 지겹다는 것이다. 욕망과 사랑, 사회와 권력, 남성과 여성의 한계를 다루며 주인공 유경과 친구들, 그들 주변의 남성들을 통해 당시 보수적인 결혼관과 남성관을 거침없이 비틀고 있다. 현실과의 접점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무겁지 않은 언어로 툭툭 터치하듯 그려냈다. 책 안쪽 작가 사진은 매우 도발적인 눈빛이다. 작가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고독해야 하고 소설 쓰기가 행복한 것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밤엔 소설을 쓰고 낮엔 공무원으로 일하는 그녀는 철저한 생계수단으로서의 직장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기사였다. 생계와 문학을 병행해야 하는 현대작가의 전형이라고. 작가는 이후 어떤 작품들을 발표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는 설탕물 속을 기어 나오는 파리와 파리풀꽃 이야기를 시에 얹었다.

나는 파리/꽃에게 가고 싶어/나비 분장을 하고 날아갔네/당신은 나의 커다란 날개만 보고/더욱더 아름다운 꽃을 피웠네/나는 파리/당신은 내가 파리인 줄 모르고 더욱 우아한 향기를 가꿨네/처음엔 단지 꽃에게 가고 싶었을 뿐 당신이 아니어도 좋았네/당신을 만나는 순간/매일 실력 있는 분장사를 찾아다녔네/힘에 부쳐도 당신이 웃어주면 그만/당신은 여전히 꽃인데/나는 나비인 척 살아가는 게 싫어졌네/될 대로 되라지/무거운 날개와 가면을 벗어던졌네/나의 변신에도 아랑곳없이/작은 날갯짓도 웽웽거리는 소리도/귀엽고 앙증맞다 했네/당신은 나를 닮은 꽃이 되어갔네/나는 깜깜한 날개처럼 불안했고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했네/쉬고 싶었네/당신은 나의 부재를 못 견디게 싫어하더니/시름시름 꽃을 떨구기 시작했네/나는 파리/당신을 평범한 꽃으로 살게 해주고 싶었네/당신에게 고백했네/나는 이제 당신이 지겨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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