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품질을 논하는 자리라면 일명 ‘파리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으로 명명된 사건을 좀 알아두면 대화가 궁색하지 않다. 잠시 1976년 파리로 장소를 옮겨보자. 이곳에서 와인 가게와 학원을 운영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게의 홍보 겸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무언가 재미있는 이벤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품질 비교 행사였다. 철저한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출품된 와인들의 맛에 순위를 붙이기로 했다. 평가단 11명 중에 주최 측 2명을 제외한 9명이 프랑스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와인의 우위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와인 변두리 취급을 받던 미국 와인이 감히 프랑스의 일급 와인들과 맛을 겨룬다는 자체에 자존심이 상하던 사람들이었다. 

출처=프리픽

 그러나 결과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레드와 화이트 모두에서 미국 와인이 1등을 차지했다. 이것을 《타임즈》의 프랑스 특파원이었던 조지 테이버 기자가 “파리의 심판”이라는 표제로 기사화했다. 프랑스인들은 멘붕에 빠졌다. 평가를 맡았던 사람들은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인터뷰를 회피했고 한동안 숨어 지내야 할 만큼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출품된 5대 샤토의 그랑크루 와인들은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햄버거에 샌드위치나 즐기는 천박한 미국인들이 만든 와인에 뒤졌다는 사실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들은 출품된 와인들에 문제가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프랑스 와인들은 충분한 숙성이 되어야 제맛을 낸다. 그런데 출품된 와인들은 덜 숙성 된 와인들이었다. 그래서 벌어진 결과라는 주장이었다. 

 그 후 30년이 지났다. 숙성 기간이 충분해진 프랑스 와인들을 출품시켜 재대결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드디어 2006년, 같은 주최자가 같은 방법으로 재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미국의 완승이었다. 

 프랑스의 와인 품질 체계에서 국가가 인정해 준 등급 제도에는 사실 문제가 많다. 매년 수백 개의 양조장에서 와인이 생산된다. 따라서 어떤 국가적 단체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품질을 검사해서 등급을 발표한다면 누구든 시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1등급 와인들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프랑스의 5대 1등급 와인은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결정되었다. 그 이래로 이들이 생산하는 와인은 무조건 그랑크루 클라세(Grand Cru Classe)라는 1등급을 국가가 인정해 준다. 물론 그들은 명성에 맞는 와인 품질을 유지하려고 꾸준히 노력했을 것이고 대부분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파리의 심판에서 미국 와인에 밀린 것도 사실이다. 현재 와인의 품질은 굳이 프랑스를 택하지 않아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평준화가 이루어진 것 같다. 유럽의 나라들은 물론 남미 쪽의 생산자들도 무시 못 할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양조용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대구에서 재배되던 사과가 이젠 영월이나 태백에서도 자란다. 이게 좋은 징조이든 아니든 요즘 기후가 전과 같지 않음은 세계적 현상으로 보인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도 우리들의 와인을 만들어 한국판 ‘파리의 심판’을 벌여 볼 수 있지 않을까? 야무진 꿈에 한 표를 던져본다. 

홍성표(전 한국와인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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