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시각예술작가

지난해 10월 19일 새벽, 동내면 거두길 243-2에 자리한 주택에 누전이 발생했다. 불꽃은 화마(火魔)가 되어 순식간에 모든 걸 앗아갔다.

김영훈 판화가의 집과 작업실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생명 같은 그의 작품 수백 점과 아내 지유선 도예가의 작품까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또한 그가 보관하고 있던 절친인 고(故) 정연삼 작가의 작품 2백여 점도 모두 소실됐다.

김영훈 작가가 화재의 아픔을 딛고 열한 번째 개인전 <스스로 스스로>를 14일부터 20일까지 문화공간 ‘역’에서 연다. 그는 ‘그림계(契)’를 통해 후원해 준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1년이 지났다. 김 작가는 11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설치판화 장르에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시각예술법인 ‘예술밭사이로’대표이자, 예술가 협동조합 ‘공공미터(00美터)’의 구성원이며, 춘천시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 추진위원이다. 지난 1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김영훈 작가를 만나 그간의 소회와 문화도시 춘천에 대해 예술가로서의 의견을 들었다.

화마(火魔)가 남긴 상처… 그림계(契)로 치유

“결혼기념일이었고 임신 중인 아내와 딸은 처가에 있었다. 새벽 4시, 굉음에 놀라 뛰쳐나갔다. 수장고 겸 작업실의 고압 단자함에서 발생한 불꽃이 순식간에 불기둥으로 변했다. 절반 정도 탈 때 넋이 나가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충격과 포기를 넘어서 마음이 편해지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웃음)

그에게 화재는 처음이 아니다. 10살 무렵, 인제군 고향 집도 불에 타 사라졌다.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해 평소 각별히 주의하며 살아왔는데도 같은 일을 다시 겪었다. 

“나와 가족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아이가 충격받을까 염려되어 새로 집을 짓는 공사 중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그나마 여기저기 전시 중이던 4 작품은 남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애지중지 보관해온 친구 연삼이의 작품들이 모두 사라져 정말 안타깝다. 친구들을 만나면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 있었다. ‘언젠가 세상을 떠나면 내 작품과 연삼이 작품들이 또다시 누군가에게 업보처럼 남을 텐데 어떡하냐?’라고 말이다. 사실 모든 작가들의 고민이다. 그런데 화재를 겪고 나니 혹시 연삼이가 미안해서 짐을 덜어주려고, 모두 가져간 건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

불안과 악몽에 쌓여 한겨울을 캄캄한 터널에 갇혀 지낸 작가,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그의 마음에도 봄이 찾아왔다.

“3개월 정도 지나자 외상 후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고 주변이 보이더라. 아이는 여전히 맑고 건강하게 자라고, 아내도 나름 잘 견뎌주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처갓집에 잠시 신세를 졌는데 다행히 여러 조건이 맞아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 그리고 막내 아이도 건강하게 태어났다. 희망적인 일들이 다시 생겨났다.”

성실히 살아온 그에게 따뜻한 손길이 다가왔다. 박미숙 ‘느린시간’ 대표와 서숙희 화가, 정현경 큐레이터 등이 ‘그림계’를 통한 후원을 주선해줬다. 23명의 시민이 10달 동안 5~10만 원씩 곗돈을 모아 작가에게 전달하고, 작가는 그 대가로 작품을 완성하여 전시회와 동시에 후원자들에게 작품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작가는 작품값을 선불로 매달 받게 되어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고집 센 예술가가 거절할까봐 준비를 다 해놓고 ‘무조건 해’라고 통보하더라. (웃음) 호의는 감사했지만 자유로운 작업이 어렵겠다는 염려 때문에 망설였다. 하지만 거절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같은 일을 겪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이런 좋은 선례가 계속 이어지려면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단, 후원자들의 신상은 전시 전까지 알려주지 말라고 조건을 달았다. 누가 지켜보는 듯한 부담도 내려놓고 열심히 작업했다. 작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어 정말 고마웠다. 이렇게 집중하고 벌이에 대한 부담 없이 작업한 시간이 정말 드물었다. 화재 트라우마도 점차 극복할 수 있었다. 대신 작업을 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후원자로 생각했다. ‘이분이 나의 후원자일 수 있어’라는 생각에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더라. 나를 관심 갖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치유도 되고 새로운 에너지가 생겼다.”

김 작가는 작업 중에 3차례 메일을 썼고 박미숙 씨가 후원자들에게 전했다. 다음은 그가 전시회를 앞두고 보낸 마지막 메일의 일부이다.

“‘그림계’라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망설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 올곧이 작업에만 집중했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중략) 붓끝이 가리키는 욕망이 저급하거나 가식적이지 않기를, 본질과 진실을 향해 있기를 경계하고 경계하며 지내 온 한해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나를 끄집어내어 서로 정면으로 응시하며 우리가 사는 이유를 묻고 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를 만났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과 나누려 합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담긴 조그마한 네모 틀로 인해 앞으로 당신과 당신이 만나는 시간이 조금 더 소중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중략) 무엇보다 저에게 몰입의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주셔서 다시 한번 진심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열한 번째 개인전 <스스로 스스로> 10.14.~10.20. 문화공간 ‘역’(남춘천역 1층)

작가가 그림계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작품 54점(실크스크린 30점·동판화 5점·회화 19점)이 전시된다. 특히 그동안 주로 사용한 동판화 메조틴트 기법보다는 선과 면으로 간략하고 단순하게 표현된 실크스크린 작품들이 다수 선보인다. 

작가는 외적인 ‘나’와 ‘자아’를 분리하여 이미지를 구성한 연작들을 통해,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질문하며 온전히 만날 것을 권한다.

“누구나 아픔의 시간을 보낸다. 작품 속 인물은 김영훈, 23명의 후원자들, 관람객, 이 세상 모두이다. 작품을 보고 자신과 당당하게 대면하고 대화하며 스스로를 보듬고 험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이제 곧 전시회에서 후원자들을 만난다. 나를 돌아보게 된 시간과 계기를 주어 정말 감사하다. 나의 작품을 통해 후원자도 관람객도 그런 시간과 계기를 갖게 되길 바란다”라고 인사를 전한다.

‘농촌 한 달 살이, 도심 예술가 버전

김 작가는 문화도시 춘천에는 예술가를 늘리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가 대표로 있는 ‘예술밭사이로’가 구상 중인 계획을 들려줬다. 

“작가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춘천은 비슷한 규모의 타 도시와 비교해서 자연과 인프라 등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힌다. 주거·육아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술가 특히 부부 작가들이 전국에 정말 많다. 그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농촌 한 달 살이 도심 예술가 버전’을 시도해보자. 장기적으로는 시가 동네 곳곳의 빈집을 예술가 부부,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육아 등 다양한 지원을 해주는 거다. 춘천에 가면 안심하고 창작하며 살 수 있다는 신뢰와 희망이 생기며 정착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날 거다. 춘천 동네 곳곳에 자연스레 퍼져 살며 정겨운 이웃이 될 거고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을 거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면 춘천은 스스로 문화도시로 만개할 거다. 거대한 창작센터를 짓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다. 예술분야의 정책은 실험적일 수밖에 없다. 사고를 바꿔야 한다.”

춘천시립미술관 그리고 공유공간

김 작가가 시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 참여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시립미술관이 있었다면 화재에도 작품은 남아있을 거라는 점과 춘천의 미래세대를 위해서다.

“시립미술관이 없다는 건 28만 도시에 시립도서관이 없는 격이다. 지역의 많은 예술가들이 남긴 자산이 기록·보존·교육되지 않은 채 잊혀지고 있다. 시립미술관은 단순히 큰 규모의 전시장이 아니다. 연구·사례조사·아카이빙·기록·작품소장·예술교육·시민의 문화예술 향유까지 아우르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예술가들에게는 열심히 가치 있는 작업을 해서, 검증받게 되면 사후에도 살아 숨 쉬고 대중과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는 곳이다. 현재 춘천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SNS챌린지가 진행 중이고, 10월 16일과 23일에는 시민 서명 캠페인을 명동에서 열어 시립미술관 건립 당위성을 알리고 동참을 촉구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작가들을 위한 문턱 낮고 저렴한 공유공간도 절실하다. 하나, ‘공동 수장 시설’이 필요하다. 모든 작가들은 공간에 대한 부담을 늘 안고 산다. 창고형 대형 수장고를 조성하여 누구나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작품을 보관할 수 있다면, 작업실 유지 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창작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수장고의 작품들을 활용한 상설전시도 열어서 시민의 문화예술 향유에도 크게 공헌할 수 있다. 둘, 문턱 낮고 저렴한 장기 임대 ‘공장형 예술창작공간’도 필요하다. 소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현재의 레지던시의 한계를 극복하여 여러 작가들이 모여 시너지를 내면서 전시·판매·교육이 상설로 운영되는 곳이다. 관광 자원이 되어 작가와 지역에 고루 도움을 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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