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비치, 검은사각형, 1915 / 프랭크 스텔라. 높은 기, 1959 / 앨런 맥컬럼, 대용그림, 1980

세 개의 검은 그림이 있다.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는 이 그림들은 다른 시기에, 다른 예술가에 의하여 그려졌다. 

서구미술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점차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진화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1839년 사진의 태동은 3차원 세계의 환영을 평면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으며, 점차 회화를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으로 이끌었다. 결국 19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회화가 그 본질에 다다른 것으로 여겨졌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Black Square)’은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시각의 본질적인 영역으로 환원시키고 오로지 검은 사각형만을 남겼으며 그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은 절대회화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미술에 대한 한계와 추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회화의 본질에 다다르려는 노력은 결국 단지 캔버스 위에 물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프랭크 스텔라의 ‘블랙 페인팅(The Black Paintings)’ 시리즈는 그러한 단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는 페인트를 사용하여 캔버스의 틀과 평행하게 붓이 지나간 자리를 만들었다. 가느다란 하얀 선은 그린 것이 아니라 검은 붓 자국이 지나지 않은 캔버스 바닥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 것으로, 프랭크 스텔라는 이 작업에 대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지금 보고 있는 캔버스와 페인트라는 재료 외에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그 너머의 의미를 찾지 말라는 뜻과도 같다. 이처럼 그는 그림으로부터의 환영을 없애버리고 그림 그 자체가 가지는 물리적 현존성을 표출하며 ‘미니멀리즘’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장르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세 번째 검은 그림은 1980년경에 앨런 맥컬럼이 제작한 ‘대용그림(Surrogate Painting)’이다. 이 작품은 석고 틀로 캐스팅하여 주조한 후, 마치 말레비치의 추상화와 그 액자처럼 보이도록 색칠한 작업이다. 과연 예술가의 창작과 독창성에 관하여 이 작품이 제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진보와 발전이라는 모더니즘의 세계관은 무너지고, 그 붕괴의 과정을 우리는 이후의 미술을 통해 점진적으로 보게 된다. 예술가들은 기존 양식을 재활용하고 대중문화에 대한 복제 등을 적극 활용하며, 예술의 독창성과 순수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0세기 초 추상화가들은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찾아 정신적인 세계를 지향하였으나 결국 추상미술은 근대 모더니즘의 보편적인 조형언어가 되지 못하고, 어쩌면 고급 취미를 지닌 계층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되어 버렸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세계관은 보편성보다는 다양성에 있다. 다행히도, 회화의 종말이라 불린 검은 그림 이후에도 여전히 회화는 진행형이며, 더 다양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매체로 남아 있다.

정현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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