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욱 시민기자(작가, 춘천문인협회 회원)

1971년 2월 말의 어느 날, 나는 집에 있다가 나를 찾는 전화를 받는다. 투박한 강릉 말투의 그 전화 목소리를, 반세기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강릉에서 온 박기동입니다. 이번에 강원대학 체육과에 합격했습니다.”

“아이고 축하합니다.”

“선배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 어디서 만날까요?”

다방의 시대였다. 인구 10만을 넘은 지 얼마 안 된 춘천에 다방이 100개가 넘는다고 했다. 나는 그 수많은 다방 중 외지 학생 박기동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다방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춘천 한복판인 중앙로 로터리의 ‘도심다방’을 떠올렸다.

그렇게 되어 우리는 지하에 있는‘도심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박기동 그는 안경을 쓴 갸름한 얼굴이었다.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지만 그간 대관령을 사이에 두고 편지 왕래는 수차례 있었던 터. 

강릉 지역의 문학하는 고등학생 중 리더 격인 박기동. 그는 필드하키 선수이면서 시를 쓰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학생이었다.

그날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강원대학 최초로 문학회 발족에 뜻을 모았다. 석 달 후인 5월 15일, 역시 지하다방인 ‘남강’다방에서 이름도 독특한 ‘그리고 문학회’가 출범하게 된 연유이다. 

‘그리고 문학회’는 6년간 존속하다가 1976년 가을에 해체되고 말았는데 그 성과는 만만치 않았다. 시인으로는 박기동, 신승근, 김혜순, 심경애가, 소설가로는 이병욱, 최성각이, 평론가로는 서준섭이 배출된 것이다.

박기동 시인은 강원대학 스포츠과학부 교수로서도 공적이 현저하지만 시인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업적을 쌓았다. 끊임없이 펴낸 시집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마도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갈 일 없이 춘천에서만 사는 안정된 대학교수 생활’의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에 비해 몇 년에 한 번은 반드시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근 가야 하는 중등교사 신분의 나는 오랜 세월 작품 하나 쓰지 못했다.

94년의 일이었다. 영월고등학교에서 춘천의 모 고등학교로 전근 온 아비를 따라 부안초등학교로 전학 와 다니게 된 우리 딸애가, 어느 날 얼굴이 해맑은 같은 반 친구를 데리고 와서 이러던 거다. 

“아빠. 얘 이름이 ‘박윤주’이거든. 그런데 얘가 자기네 아빠와 우리 아빠가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래.”

놀란 내가 그 애한테 물어봤다.

“너희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니?”

“‘기’자, ‘동’자입니다.”

세상에 우리 딸과 박기동 시인의 딸이 한 반 친구라니. 나는 순간 그 오랜 세월 전 중앙로 로터리의 도심다방에서 만난 박 시인과 내가 ‘어린 여자애들로 변신해서 다시 만난 것’같아 한동안 말을 잊었다.  

   

박기동

강릉 출생으로 강원대학교 스포츠과학부 교수 역임. 1982년 <심상>으로 등단 후, <내 몸이 동굴이다> <다시 벼랑길> <나는 아직도> <어부 김판수> 등 다수의 시집.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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