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춘천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이희용과 김영훈, 두 작가의 검은그림이 전시되었다. 지난 칼럼에서 ‘검은그림’이라는 타이틀로 말레비치와 프랭크스텔라의 검은 사각형을 언급한 바 있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3차원의 환영을 없애버린 회화의 종말이었다면, 여기 지금 두 개의 검은그림은 그 단순한 색조에도 불구하고, 깊은 환영을 평면 위로 다시 소환한다. 블랙과 화이트의 모노톤으로 이루어진 화면을 만들어내는 그들이 가장 깊이 몰두하고 구현해 내는 것은 어둠보다 더 깊은 검정이다. 그러나 그 어두움이 존재하는 영역은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한 사람이 형상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이라면, 다른 한 사람은 대상의 외부를 감싸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다. 

김영훈 작가의 화면 속 인물은 세상으로부터 눈을 감고, 깊은 어두움 속으로 침잠한다. 흠결 없이 고운 블랙의 인물 이미지를 통해 작기는 스스로 안으로 향하는 무한한 깊이와 외적으로 확장하는 넓이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형상을 표현한다. 무의식으로의 여행과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으로의 여정은 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은 무게와 한없는 가벼움을 상징하고 있다. 작가는 끝내 알 수 없는 어둠과 한낱 우주의 일부인 미약한 존재의 경계에 머무르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세계를 유영한다. 그 풀 수 없는 무언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이가 김영훈 작가다.

이희용 작가의 작업은 박물관에서 어두움 속에 조명을 받고 빛나고 있는 도자의 형상을 보았던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어쩌면 그의 작업에서 가장 공과 시간을 들이는 것은 형상보다는 배경에 있다. 그는 연필로 칠하고 펴 바르는 반복적이고 수행적인 과정을 통해 깊은 어둠을 완성해 낸다. 정작 실재인 듯 존재하고 있는 대상은 오롯이 비워져 있다. 도자기의 형상은 연필이 아닌 지우개와 찰필. 면봉 등으로 새기고 지우며. 바탕의 흑연을 끌어와 형상의 깊이감을 빚어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이토록 반짝이는 도자기의 물성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것인지, 주위의 공기와 빛과 어둠이 그 사물의 존재에 깊이를 부여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작가는 비워냄으로써 온전히 스스로에게 가 닿고자 한다. 그 대상이 바로 그것일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그 존재의 바깥인 것이다.

이처럼 다른 두 개의 검은그림은 감상의 지평은 다를 수는 있으나, 시대와 장소를 넘어 관람객의 마음을 조용히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알록달록한 총천연색의 세상과 빠르게 변하는 속도전의 시대에 수행적인 작업을 통해 완성해 낸 흑백만으로 깊은 침묵과 명상의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정현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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