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서 시민기자(소설가)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나자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설마 내 뱃 속에 있다가 나온 걸 기억하는 것은 아니겠지. 세상에 나와 줄곧 얼굴을 마주하며 내가 엄마라고 일러 준 탓일 거다. 엄마를 알아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나, 아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좀 안아보려고 하면 ‘내 몸에 손대지 마!’ 하는 듯이 격렬하게 울어 재끼며 엄마 이외의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는 듯이 엄마만 찾았다. 내가 여태 누군가에게 이렇게 절대적인 존재였던 적이 있었던가. 내게만 의지하는 어린 생명을 보며 뿌듯한 마음도 들었지만,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아이를 보면서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가 계속 그랬다면 나같이 미숙한 사람은 아마 엄마 역할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아이는 자라서 서서히 엄마를 놓아 줄줄 알았다. 네 살이 되자 아이는 자신이 먹는 과자를 내 입에 욱여넣었다. 제 방식의 사랑 표현이라 생각하니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네 살짜리가 좋아하는 과자를 보통의 어른이라면 좋아할 리가 없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그 과자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게 따로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말을 하면서도 아이가 알아들었을까 갸웃했지만, 아이는 더 이상 자기가 먹는 과자를 내 입에 욱여넣지 않았다. 설날 세뱃돈을 받은 아이는 마트에 가자더니,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 주겠다고 한다. 내가 맛있게 과자를 먹는 것을 보고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소파 위에서 종일 뛰어다닌다.

 모두 사랑이다. 하지만 나만 바라보라고 하는 유아적 사랑은 상대를 지치게 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상대를 괴롭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조금 성장한 사랑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상대에게 주려고 한다. 거기까진 좋으나 이것이 강요된다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형태의 사랑은 가족 간에 주로 나타난다. 특히 부모가 자녀에게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자녀는 숨이 막힌다. 보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찾아 해주려고 하고, 그로 인해 행복해하는 상대를 보며 같이 행복해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가족이나 연인보다 친구 사이에서 좀 더 쉽다. 때론 좋은 친구 관계가 연인 관계보다 오래 지속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사랑을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상대를 향한 마음이 깊을수록 집착은 더해지고 상대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를 향한 마음과 나의 인격이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할 때 사람은 더불어 성숙해진다. 갑자기 추워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온기를 나누며 모두가 조금은 덜 추운 겨울이 되기를 바라본다. 실은 나도 어렵다. 어린아이도 하는 것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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