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나리오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그것도 영화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말이다. 유덕화, 오천련의 천장지구, 줄리아 로버츠의 프리티우먼을 보기 위해 영화관 출입을 했던 옛 기억이 있다. 영화 티켓값을 지불한 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영상을 보이는 그대로 눈에 담아내기만 했던 단순한 영화 소비자, 그게 나의 모습이었다. 

 작년 무렵 춘사톡톡에서는 춘천살이를 하고 있는 조창호 영화감독을 모시고 시나리오를 읽고 김재욱, 서예지 주연의 영화를 감상하기로 계획했었다. 코로나로 인해 한 달, 두 달 미루다 보니 지금에서야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미뤄짐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신 감독님을 비롯하여 준비를 위해 애써 주신 분들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얹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1. 동서울터미널-맥도널드(낮)

 스마트폰의 모 사이트 화면.

“외롭네요. 어딘가 종착지가 있겠지요. 그곳에서 파티를 합시다. 

함께 여행갈 사람 댓글이나 쪽지 주세요” - 검은새

망설이던 수완, 글 올림 버튼을 누른다…

다른 길이 있다. 조창호 시나리오집 中

 

검은새와 흰새...

어린 시절 엄마의 죽음으로 아픔을 겪은 나약한 경찰관 수완(검은새)과 전신마비의 엄마를 돌보며 결코 타인에게 공유할 수 없는 아픔을 숨기며 평범한 척 살아가고 있는 이벤트 도우미 정원(흰새)은 서로 다른 듯 같은 이유로 생의 마감을 같이할 동지를 찾게 되고, 이곳 춘천에서 조우하게 된다. 내면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은 관객들의 몰입을 끌어냈고, 청평사의 고즈넉한 풍경, 공지천의 오리배, 중도 선착장 등과 어우러진 두 주인공의 모습들이 마음 한편에 잔잔한 울림을 안겨주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인간 내면의 고통을 여과 없이 들여다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37. 채팅 2 (밤)

흰새: 여기요. 춘천 검색하다가 찾았어요. 누에섬이라고.

검은새: 누에섬...

흰새: 얼었는지 모르겠는데 빠져 죽는 걸 고집하신다면, 혼자 걸어가도 되겠어요.

검은새: 차에서 죽는 걸로 하죠. 연탄가스로. 차 있나요? 제가 렌트할까요?

 -중략-

검은새: 다 됐어요. 2월 15일 두 시에 춘천 누에섬 입구에서.

흰새: 그때 뵙죠.                        

다른 길이 있다. 조창호 시나리오 집 中 

 

예정일보다 춘천에 일찍 도착한 이들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채팅 속의 사람임을 모른 채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지만 서로 다른 방법으로 죽음의 문턱으로 향하고 만다. 죽음을 향한 여행의 결말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고 싶다. 삶이 지칠 때 꼭 한번 봐야 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재개봉을 슬쩍 바라본다.

몇 해 전 사람이 희망이라던 그분도, 노동자의 희망버스를 달리게 해준 그분도, 희망의 길을 걷자며 백두대간을 걷던 그분도, 문배주를 마지막으로 내게 선물해주신 그분도 우리 곁을 허무하게 떠나갔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던 것일까? 슬픔에 앞서 “왜”라는 물음이 요동쳤던 순간들이다. 삶에 있어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면 다른 길을 내어보자. 다른 길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니까... 

고통을 서로 나누어 갖게 된 검은 새와 흰 새의 다른 삶과 

실레길 어디선가 무언가를 계속 집필하고 계실 감독님을 응원하겠다.  

영화 속 얼음 숨구멍 소리가 들려온다.  

안수정(춘사톡톡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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