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춘천에 구석기시대 주민의 흔적이 보인 후, 신석기시대에는 ‘춘천혈거유지’를 대표로 하는 동굴유적, 서해안식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는 시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청동기시대로 이행하게 된다. 과거 한국고고학계는 신석기시대 주민과 청동기시대 주민이 교체되었다고 보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다만, 어떠한 양상으로 청동기시대로 이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1) 내평2리 전경, 2) 소양호 내 내평리 위치(다음지도)  3) 내평리 신석기시대 부석주거지 실측도 4) 부석 제거전과 제거후 주거지 전경 5) 신석기시대 퇴화빗살문토기 도면 6) 융기대문토기 편 사진

최근, 근화동에서는 가장 이른 청동기시대 청동제품 조각이 발견되고 고고학계에서 논의 중인 청동기시대 조기(早期)에 해당하는 유적이 확인되고 있어 조만간 춘천지역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전환기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70년대에는 주민의 교체가 가장 유력한 이론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견해를 물리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춘천에서 발굴조사되었다.

춘천 내평리유적

춘천 내평리유적은 소양댐수몰지구에 속해 있는 내평리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발굴조사는 1971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지금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 하에 서울대학교, 국립중앙박물관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돌널무덤(石棺墓)·네모난집자리(方形竪穴住居址)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돌깐집터(敷石住居址) 등이 확인되었다. 이때, 지금의 천전리고인돌떼 남쪽의 고인돌들이 소양댐 축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보고서에는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돌깐집터로 보고되어 있다. 크기는 동서 길이 12.3m, 남북 너비 4m의 타원형으로, 내부에는 황갈색 사질토 위에 돌이 깔려 있고, 일부는 깎여 나가거나 교란되어 있다. 깐돌을 들어낸 내부에서 불뗀자리(爐址)가 확인된다. 그리고 집자리 주위에서는 약 11개의 불뗀자리가 발견되었다. 깐돌 사이사이와 화덕자리 주위에서는 집선문(集線文)·종주생선뼈무늬(縱走魚骨文)·마름모무늬(菱形文) 등의 문양을 가진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연대는 문양이나 바탕흙(胎土)으로 보아 전형적인 신석기시대 말기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퇴화빗살무늬 바탕에 아가리(구연부) 밑에 융기문을 덧붙인 토기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토기는 신석기시대에는 확인되지 않는 양식의 것이었다. 즉, 문화적인 변동이 토기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돌깐집자리’는 내부에 깐 돌을 제거하자 불뗀자리가 나왔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집자리가 폐기되는 과정에서 석재가 재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집자리 폐기와 관련하여 동일한 양상이 화천 용암리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청동기시대로 어떻게 전환되었을까?

춘천에서는 내평리 신석기시대 집자리 이외에도 근화동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청동기 편과 각목돌대문토기가 확인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우두동에서는 각목돌대문토기와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편이 함께 출토되는 유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춘천에서는 신석기시대 주민이 청동기시대로 전환되어가는 모습이 내평리유적에서 확인되고 북방지역에서 이주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각목돌대문토기문화인들의 집자리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모습은 춘천지역의 문화가 일원적인 것이 아니라 다원적인 문화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춘천은 선사시대부터 다양한 외부의 문화 요소를 받아들이고 자체적인 변용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춘천은 폐쇄적인 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고 유물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심재연 (한림대학교 한림고고학연구소 연구교수)

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4, 《팔당·소양댐수몰지구유적발굴종합조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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