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소비는 없다》 , 저자 최원형

누구 이야기인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제가 감히 던지는 질문입니다. 한 사람의 평생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요즘 기후는 이상합니다. 이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반세기 전 제가 대학생일 때 몇몇 기후학자들이 이런 불편한 사실을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예측하고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국가 지도자들도 별 신경 쓰지 않아 왔었습니다. 그러다 겨우 여섯 해 전 국가 수뇌들이 모여 문제의 심각성에 동의하고 지구온난화를 막자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각국이 목표치로 정한 탄소 배출량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각 나라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 기후 현상을 결국 ‘기후 위기’라고 부른지 겨우 사 오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그 심각성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정말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엔 퀴즈 문제 정답을 알게 된 수준일 뿐이어서 그 심각성 인식이 머리에만 머물고 아직 가슴까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고 생각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解之를 해야 할 結者가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들의 이런 생각은 과연 옳은 건가요? 아무 잘못도 없는 분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분들에 대해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참사 희생자들에 대해 속으로 우리는 참으로 미안해합니다. 그래서 줄임말 ‘지못미’라는 신조어도 생겨났지요. 그런 애꿎은 희생자는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안전불감증이 그 원인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각자가 그런 안전불감증을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 있는 법도 만들지 않았고 우리 각자가 마찬가지로 생활했던 것도 그 근본 원인이 되었던 거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결국 생면 부지의 고등학생이 수장된 된 것도, 갑자기 다리가 무너지고 빌딩이 무너져 추락사하고 압사당하는 일들도 벌어졌던 거 아닌가요? 이런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보고 말로만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했던 거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모두 그들의 죽음에 조금은 책임이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터전이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병이 깊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겐 없을까요? 세상에는 아직도 불편부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은 갈수록 힘들지요. 만일 기후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삶이 가장 힘들어질 분들은 현재 경제적으로 가난한 분들입니다. 또 어떤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을 때 그제야 ‘지못미’를 외치며 가슴만 칠 건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과연 책임감 있게 사는 삶일까요? 과거 우리가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기 위해 가졌던 생활 태도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과거엔 가난을 이겨내려고 그리도 아끼고 나누고 살던 삶 말입니다. 이제는 또 다른 더 큰 이유로 우리가 모두 다시 그리 살기를 제안합니다. 착한 소비는 없습니다. 오감 만족의 삶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경제 아래에 사는 우리는 남들 모두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양심은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오감 만족의 강을 건너야 양심의 가슴에 다다릅니다. 그러려면 똑똑한 소비를 해야 합니다. 모두가 《착한 소비는 없다》를 읽고 그 강을 건넜으면 합니다.

조리노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