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역사문화를 연구하는 중도리안 오동철

중도의 레고타워가 멀리서도 보인 얼마 후, 레고랜드의 연간 회원권이 2주 만에 매진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 시간 중도를 끝까지 지키겠다던 중도리안들은 어떤 감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2018년 7월, 《춘천사람들》(이하 춘사)의 기자 오동철이 춘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필자는 “레고랜드 문제를 두고 어딜 가느냐”고 그를 만류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2015년 9월 춘사의 창간준비호부터 그만둘 때까지 기자 오동철은 중도 레고랜드 사업과 관련한 기사를 72건이나 쏟아 낸 그야말로 레고랜드 통이었던 것이다. “레고랜드 문제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서” 그는 떠난다고 했다. 지난 2021년 11월 27일 중도문화연대의 37회 중도걷기 행사가 열렸다. 그날의 풍경을 지켜본 필자는 아주 솔직하게 ‘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운행하는 레미콘과 덤프트럭의 행렬은 어지러웠고 포클레인과 불도저의 바쁜 움직임은 보기에 고통스러웠다. 그 풍경 속 (겨우) 다섯 중도리안의 행진은 곳곳에서 가로막혔다. 그럼에도 오동철은 의연했다. 표정 연기가 아닐까 의심되었다. 

다양한 챕터가 있는 오동철을 한 번의 인터뷰로 축약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레고랜드 문제에 집중하기로 하고, 중도걷기 행사를 끝낸 후 우두동의 ‘역사문화연구회’로 옮겨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 고향은 화천 사내면입니다. 1973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했는데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20리쯤 떨어진 마을의 먼 친척 아저씨에게 데려다 놓았어요. 그분은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훈장님이셨는데 한문을 배우라고 보낸 거지요. 결국 그 해엔 중학교에 못 가고 이듬해에 재건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지요. 일종의 야학 같은 건데 오후에 등교해 저녁까지 공부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근로활동을 하는…. 정규과정의 교육은 그게 끝이었어요. 당연히 대학은 문턱도 못 갔지요.” 

20대 농사일을 하던 시기의 1983년 겨울, 효자동 수녀원에서 강원도 카톨릭농민회 총무였던 유남선 선생과 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를 처음 접한 오동철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4-H(지, 덕, 노, 체를 바탕으로 한 농업구조와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 활동을 하며 농촌에 얼굴이 어느 정도 알려졌던 그는 그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농민운동에 뛰어든다. 화천 사내면에서 농민회를 창립하고 화천군 농민회 홍보담당을 하며 91년까지 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1991년 결혼을 하며 생업이 우선 되었지요. 스포츠용품을 파는 장사를 하다가 선배가 운영하는 건설회사에 잠시 일을 도와주러 간 게 인연이 되어 2004년까지 건설 쪽 일을 했어요. 석사동의 성림초등학교 신축현장과 효자1동 주민자치센터 등 건설 소장을 했는데 2004년에 강릉에 보건소 신축현장의 사업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실패가 뻔히 보이는 일인데 회피할 수 없었지요. 망했고 그 후 돈 버는 태도를 바꿨어요. 월급쟁이 안 하고 돈의 노예는 되지 말자 다짐했지요.”

그 후 당신은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계기가 있을까요? 역사문화연구소의 배경도 궁금합니다.

“2007년 숲 해설가 과정을 공부했고 산림경영기사와 공학기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어요. 숲 해설가와 산림 관련 일을 하던 2008년부터 자연스럽게 옛길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점점 깊게 빠져들었어요. 춘천지역의 옛길을 조사하다 보면 역사에 연결되고 그 내용을 개인 블로그에 올리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현재의 나를 만든 결정적 계기가 강촌의 정재억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함께 2010년 역사문화연구회를 창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어요.”

역문연멤버와 함께 찍은 사진. 윗줄 맨오른쪽 

그렇다면 중도 레고랜드 반대 운동은 역사문화연구의 본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2011년부터 레고랜드 건설 이야기가 나오고 2012년 우리 역사문화연구회에서 강원도에 공문을 보냈어요. 중도는 선사 유적이 밀집된 지역일 가능성이 크니 정밀발굴 후에 결정해야 한다는. 정밀발굴 이후에 하겠다는 답을 받았지요. 2013년 발굴이 시작되고 2014년 7월 29일 처음으로 발굴현장이 공개되었는데 엄청난 유적에 놀랐어요. 현장에 있던 국립대 사학과 교수에게 물었어요. 이렇게 엄청난 유적이 있는데 레고랜드 못하는 거 아니냐고. 이미 발굴했는데 어쩌냐, 건설해야지 이런 충격적인 답변에 며칠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바로 8월부터 레고랜드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파면 팔수록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온 거지요.”     

레고랜드 사업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우선은 사업구조예요. 문제가 있더라도 중단할 수 없는 계약으로 돼 있어요. 두 번째, 레고랜드가 처음 시작할 때 강원도민들은 강원도 예산이 하나도 들지 않고 단지 땅만 빌려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땅을 헐값에 사서 그걸 비싸게 팔아서 하는 것이었어요. 처음부터요. 기만과 거짓으로 시작해서 계속 기만하고 있어요. 세 번째는 선사 유적의 문제인데 중도의 선사 유적은 대한민국에서 한 번도 발굴된 적 없고 앞으로도 나올 수 없는 유적입니다. 이미 대한민국에서 대단위 선사 유적이 나올만한 곳은 다 알려졌는데 중도는 다른 지역을 압도해요. 청동기 유적으로만 국한하면 중도와 같은 유적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죠. 그게 바로 춘천의 역사와 맞물려 있고 우리나라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하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레고랜드의 순기능과 경제적 기대를 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최초의 레고랜드는 레고그룹이 덴마크의 빌운트라는 도시에 만들었어요. 유럽식 아이들 교육에서 좋은 아이템이었지요. 나는 중도가 아니라면 레고랜드 사업을 반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중도에 건설되는 레고랜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치인 선사 유적을 파괴하고, 철저한 자본이익 추구와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의 가치를 올리는 멀린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합니다. 최문순 지사가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고 했는데 멀린의 1년 매출은 우리나라 삼성의 2%도 안 되는 회사죠.”

레고랜드 고발장을 접수하는 모습

4대강이나 강정해군기지가 그러하듯 정부가 작정한 사업을 시민사회가 막아내기란, 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줄곧 레고랜드는 만들어질 수 없다고 했던 오동철의 주장은 일종의 자기최면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오동철과 중도문화연대의 운동 방식에 양가감정이 있다. 모두가 외면할 때 깃발 들고 꾸준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반면, 당신들만이 그립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외연을 넓히거나 더 효과적일 수 있는 운동 방식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그것이었다.

“춘천시 번영회, 명동 주변 번영회 임원들과 회원들을 수없이 만나 설득해 봤어요. 최초 계획에 중도 아울렛이 있었지요. 상인들은 아울렛만 안 들어오면 상관없다는 것이었어요. 아울렛은 포기됐지만 내 주머니의 돈이 나가지 않는다고, 당장 살아가는 데 불편하지 않다고 눈감고 귀 닫습니다. 중도의 선사 유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우리가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정말 깨어있는 시민이 얼마나 있을까요? 진영논리에 빠져서 찬성하고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가장 나쁜 이들은 사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이들이지만 방관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오동철은 단호했다. 레고랜드의 시간 이후의 춘천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치려 했지만, 오동철은 레고랜드를 떠나지 않았다.

“레고랜드 문제를 처음 제기할 때 스스로 다짐했고 함께하는 분들에게도 몇 년 안에 끝날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살아 있는 동안 끝까지 레고랜드 문제를 지적할 것이고 가능하다면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겁니다. 춘천의 지역사에 천착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할 거예요. 나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짝하다가 끝내지 않습니다.” 

레고랜드는 내년 어린이날에 맞춰 개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멈추거나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이렇게 된 이상 성공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오동철이 말하는 끝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진다. 자욱한 미세먼지 풍경 속에 레고랜드 타워가 보였다.

조창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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