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비유는 창작의 원천이기도 하다. 기러기가 외롭다는 표현을 예로 들어보자. 새들이 즐거이 노래한다도 마찬가지이다. 기러기가 외롭다는 것도 화자의 단정이고, 새들이 노래한다는 것도 화자의 생각이다. 서양에서는 새의 소리를 노래한다고 하고, 우리를 비롯해 동양에서는 운다고 표현한다. 하기야 문학이 과학과 다른 지점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거짓말 하는 것을 소설 쓰지 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문자, 언어 자체가 사실이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편의적 발상에서 출발했으니 어떻게 오류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니 언어로 이루어진 담론에 대해서는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라는 말 자체도 오류이다. 

그러나 과학은 오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이나 삶에 있어서도 이런 오류는 별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걸 지칭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공고히 하기 위해 드디어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거를 장착하기에 이르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의 속성을 심리학에서는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설명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들 사이 또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사이에 불일치나 비일관성이 생기는 것을 인지부조화 또는 인지불일치라고 한다. 인지 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개인이 믿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간의 차이가 불편하듯이 인지 간의 불일치가 불편하므로 이 불일치를 제거하려 한다. 

확증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이다. 인지부조화가 내적 일관성이라면 확증편향은 외적 일관성을 찾으려는 심리라 하겠다. 현실세계의 정보와 증거가 복잡하고 불분명해서 자기 신념에 맞는 정보를 찾는 게 쉬울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에게 불행하냐고 묻는 것보다 행복하냐고 물어볼 때, 삶의 만족도가 훨씬 높게 나온다. 논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나 자료만 선택적으로 제시한다고 해서 불완전 증거의 오류라고 한다. 소비자가 포도와 체리 가운데 달콤한 체리만 골라 먹는 것에 비유하는 표현도 있다.  

유튜버, 논객, 정치인, 언론인들까지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보면,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렇다면 지금은 맞아도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틀린 것이다. 선거철을 맞이해 후보자들을 만나서 인터뷰해보면, 같은 사실에 대해서 의견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바라보는 눈이 다르니 해석도 다르고 대안도 다르다. 춘천의 현안이 되어 있는 도청사 이전 문제, 대중교통 시내버스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기존의 사실을 무시한다고 그 존재가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작가 헉슬리의 말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눈먼 사람의 도시, 눈먼 사람의 국가가 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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